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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에 사별한 쑹칭링, 남자와 악수만 나눠도 …

중앙선데이 2017.01.08 00:28 513호 28면 지면보기


문혁 초기, 장칭(江靑·강청)이 상하이의 조반파(造反派)에게 지시했다.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부모는 자산계급이다. 무덤을 없애버려라.” 쑹칭링에게도 크고 작은 박해가 그치지 않았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보호 덕에 봉변은 면했지만 상처가 컸다. 국가 지도자나 지인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민을 편지를 통해 털어놨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11-

서신 중 한 편을 소개한다. “혁명 앞에 문화가 붙은 이유가 뭔지 이해 못 하겠다. 소설, 정치 모두가 독버섯이나 다름없다. 동지들이 하룻밤 사이에 주자파(走資派), 반당집단(反黨集團), 야심가로 변했다. 당 중앙은 내게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비판을 요구했다. 나는 할 수 없다. 류샤오치 주석은 당 중앙 공작을 수십년간 수행했다. 그가 반역자라니 믿을 수 없다. 반역자가 7년간 국가주석직에 있었단 말인가? 함부로 사람을 잡아가고, 구타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헌법이 유효한지 의문이다. 당 중앙의 의견을 듣고 싶다. 무법천지를 만들어, 자신의 동지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죄악이다. 국민당과의 투쟁으로 일관한 우리의 우수한 간부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죽어나가는 원인이 무엇인가?”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불렀다. “쑹칭링은 지금의 변화를 보기 싫어한다. 싫으면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홍콩이건 어디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리지 않겠다. 대만(臺灣)도 상관없다. 내 뜻을 전해라.”



 

[“나는 평생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

저우언라이가 쑹칭링을 찾아갔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심정을 안 주석이 좌불안석이다. 해외에 나가 마음 달래며 휴식하기를 건의하라며 나를 보냈다.” 쑹칭링은 냉담했다. “내가 있는 것이 불편한가? 나는 평생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 앞으로 국경일 행사나 연회에 들러리 서고 싶지 않다. 회의도 마찬가지다. 참석하면 마음만 상해 병원 신세를 진다. 앞으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겠다.”



사망 6개월 전인 1980년 11월에도 당 중앙에 편지를 보냈다. 문혁이 끝난 다음이라 그런지 종전에 보낸 것들과 다른 내용이었다. “국가가 더 발전해야 한다. 원기를 회복했으니 좋은 기회다. 건국 이래 벌여온 정치적 운동들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끝으로 55년 전 세상 떠난 남편 쑨원(孫文·손문)을 거론했다. “부탁이 있다. 나를 국부와 같은 반열에 놓지 마라.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임종을 앞둔 쑹칭링은 당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과 국가주석 리센넨(李先念·이선념)이 병실을 방문했다. “정치국이 입당요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쑹칭링은 가볍게 웃었다. “억지로 하지 마라. 31년간 내 심장은 얼음덩어리였다. 인생은 하나의 길이다. 종착점에 다 왔다.” 후야오방과 리셴넨이 “그대로 따르겠다”며 요구사항을 물었다. 쑹칭링은 두 가지를 요청했다. “나를 쑨원과 합장(合葬)하지 마라. 상하이에 있는 부모 무덤 동쪽에 묻히고 싶다. 약간의 저축이 있다. 복지기금으로 써라.” 중공이 국가 명예주석에 추대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주일 후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바람도 틈이 있어야 들어온다’ 유행]

 



쑨원과 합장이 당연하다고 여기다 보니 묘한 소문이 나돌았다. “쑹칭링은 진작부터 쑨원의 부인이기를 포기했다.” 추측에 불과했지만, 뒷말이 그치지 않았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댔다. 어릴 때부터 쑹칭링을 잘 알았던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寥承志·요승지)가 결론을 냈다. “이런 일일수록 소문이 맞는 법이다. 죽어서 부모 옆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쑨원의 부인이라는 호칭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소문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결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인정한 것 하나만으로도 국모로 손색이 없다.” 평소 쑹칭링이 자주했다는 말도 해줬다. “나를 쑨원의 부인이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단, 내가 우리 엄마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은 없다.”



쑨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쑹칭링은 서른 두 살이었다. 미모도 그럴듯하다 보니 “장제스가 쑨원의 부인을 어떻게 해보려다 망신당했다”는 등 온갖 구설이 난무했다. 과부소리 듣기에 황당한 나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남자와 악수만 나눠도 요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공혈래풍(空穴來風·바람도 틈이 있어야 들어온다)이라는 4자성어가 유행할 정도였다. 사실이라면 뻔뻔하게 부인이라도 하겠지만 쑹칭링은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허구한 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군사 정변을 일으킨 장제스가 공산당과 결별하자 쑹칭링은 발끈했다. 쑨원이 제창한 “소련과 공산당과의 제휴”를 배신했다며 혁명 외교관 천유런(陳友仁·진우인)과 함께 소련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천유런은 쑨원이 신임하던 국민당 좌파였다. 두 사람이 중국을 떠나자 좌파 영수 덩옌다(鄧演達·등연달)도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뉴욕타임스가 쑹칭링과 천유런의 결혼설을 보도했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상대가 천유런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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