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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100일…울음, 웃음, 꼼수, 냉소 등 4가지 세태

중앙일보 2017.01.05 14:34
‘울음, 웃음, 꼼수, 냉소’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시행 100일(5일)을 맞아 볼 수 있는 4가지 세태이다. 고급 음식점과 화훼·한우 농가 등을 중심으로 서민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음식 맛이 좋고 저렴한 일부 업소에는 손님이 몰리고 있다. 반면 음식점에서는 밥값 대신 ‘외식카드’를 만들어 파는 등 꼼수도 등장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대통령도 안지키는 법을 서민들이 왜 지켜야 하냐”는 냉소의 목소리도 들린다.

◇울음=대전시 서구 만년동에 있는 한우음식점(만년애 한우) 주인 최광춘(59)씨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점포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음식점 1, 2층 가운데 1층(495㎡)을 ‘피자, 스테이크, 커피 등을 취급하는 ‘퓨전음식점’으로 개조하고 있다. 2층에서는 종전대로 한우 등 다른 메뉴를 판다. 리모델링을 위해 2억원을 대출했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 한우음식 매출이 4000만원으로 2015년 같은 기간(1억8000만원)에 비해 77%가 줄었다”며 “한우만 팔다가는 가게를 문닫을 것 같아 업종을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김영란법 이후 장사가 안돼 종업원 수를 9명에서 4명으로 줄였다”고 덧붙였다.
문을 닫는 업소도 많다. 서울 서소문의 고급 음식점인 남강도 지난달 31일 문을 닫았다. 1975년 문을 열어 40여년간 영업해 온 남강은 등심ㆍ불고기 등이 주 메뉴였다. 30여년간 이곳에서 일한 유이상(65) 전 매니저(전무)는 “김영란법 이후 저녁 술 손님, 단체 회식이 줄면서 하루 매출이 종전의 절반(400만~500만원)도 안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실업 급여를 신청했다”고 했다.

인천시청 인근 복요리집인 ‘조가복집’은 지난해 11월 폐업했다. 1인당 3만5000원부터 8만원까지 복요리를 내놓아 각종 모임 장소로 인기를 끌었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손님이 줄면서 결국 영업을 접었다. 인천시청 주변 고급음식점 상당수도 문을 닫았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국내 외식업 연말 특수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외식업체 709곳의 지난해 12월 평균 매출은 2015년 같은 기간에 비해 36%줄었다.

공직사회 인사 때 흔히 볼 수 있던 축하 난(蘭)도 사라졌다. 올 1월 1일자로 승진한 대전시청 A국장은 축하난을 서너개 받았다. A국장은 “전임 국장들은 적어도 70개 이상 화환이나 난을 받았는데 나는 난 구경하기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13일 취임한 부산지역 B경찰서장은 축하 난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대전시청 주변 꽃가게 주인 신경호씨는 “김영란법 이후 난 매출이 80%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난 재배농가도 업종을 전환하고 있다. 부산시 강서구의 강산난원 서재환 대표는 지난해 12월 농장 9256㎡가운데 2644㎡를 호박 밭으로 바꿨다. 이 일대에서는 꽃 대신 토마토나 호박으로 작목을 바꾼 농장이 상당수다. 서 대표는 “김영란법 이후 난 소비가 줄어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충북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24년째 난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박한흥(81)씨는 올해 출하량을 40%정도 줄이기로 했다. 박씨는 2015년까지 연간 5~6만본의 난을 팔았는데 김영란법 이후 판매량이 절반 이상 줄었다.

고가 선물로 인가가 있는 인삼시장도 울상이다. 전국 수삼의 70%가량이 거래되는 금산수삼센터에서 지난 2일 판매된 4년근 수삼(750g 기준)값은 3만원으로 지난해보다 4000~5000원이 내렸다. 상인들은 “가격이 내렸는데도 판매량은 하루 평균 30~40%나 줄었다”고 했다.

◇웃음=음식점이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 소주 무료 제공 등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한 음식점은 성업중이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인근 G한정식은 간장꽃게장, 고추장불고기 등 13가지 음식으로 된 정식을 1만5000원에 내놓는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에도 점심시간이면 100석의 좌석은 거의 다 찬다. 경기도의회 사무처 직원 이모(44)씨는 “음식 맛도 좋아 자주 찾는다”고 귀띔했다. 서울 종로 M족발집은 1만원짜리 족발 한 접시를 주문하면 소주 1병과 맥주 2병을 무료로 제공한다. 광화문의 한 한식집은 3만원짜리 메뉴를 주문하면 소주와 맥주를 무제한 내놓는다.

직장인들은 술자리나 회식이 줄면서 ‘저녁이 있는 삶’이 됐다며 반기고 있다. 경기도청 김모(55) 사무관은 “집에 일찍 귀가해 아내와 걷기 등 운동을 주로 한다”고 말했다. 갤러리아 등 백화점들은 오후 6시 이후 강좌를 추가 개설하고 있다.

◇꼼수=모호한 김영란법 규정의 빈틈을 노린 게 특징이다. 서울의 일부 고급 한정식집에서는 ‘5만원권 기프트카드’를 만들어 팔고 있다. 선물 상한액이 식사 상한액(3만원)보다 높은 5만원이란 점에 착안했다. 기업관계자 등이 함께 식사하는 공직자에게 기프트카트를 선물해 밥값이 3만원 이상 나와도 계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모바일 외식상품권을 판매하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한 O2O(온라인 투 오프라인)업체는 김영란법 시행에 맞춰 서울 광화문과 강남 등 주요 오피스텔 밀집 지역 식당을 대상으로 5만원권 선불형 외식카드를 팔고 있다. 공직사회에서는 밥값을 여러 차례 나눠 결재하는 쪼개기 결재도 유행한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대전청사 공무원은 “1인당 3만원이 훌쩍 넘는 소고기로 회식하려면 2·3차례 정도 음식값을 분할해 미리 결재한 다음 나중에 식사하곤 한다”고 말했다.

◇냉소=주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서민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생계가 어려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할 때가 허다한데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층은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도 법망을 빠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범을 보여야 할 고위공직자들의 전방위 ‘갑질’과 부정이 속속 드러나면서 김영란법을 계속 시행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대전시 서구 만년동에서 수퍼를 운영하는 배중진씨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층은 수백억원대 비리의혹에 휩싸여 있는데 영세 상인들은 밥값 3만원, 선물 5만원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며 “이런 마당에 김영란법을 엄격히 적용하는 게 온당한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김영란법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권익위 자문위원인 안양대 송준호(경영학)교수는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한 서민경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일부 시행령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낸 이상민(대전 유성을)국회의원은 “최순실 국정 농산 사태가 불거지면서 김영란법 취지가 무색해지는 감이 있다”며 “4급 이상 고위공직자 중심으로 엄격히 적용하는 방식으로 우선 시행한 뒤 점차 대상을 넓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도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영란법 적용 범위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대전·부산·수원·청주=김방현·최모란·최종권·김민욱·이은지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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