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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는 것 자체가 재난 아닌가…영화 속 실세 총리 모델은 김기춘”

중앙일보 2017.01.05 00:55 종합 23면 지면보기
재난영화 ‘판도라’ 박정우 감독
박정우

박정우

원전 사고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 ‘판도라’가 5일 현재 45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대형 지진에 이은 원자로 폭발 사고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되는 끔찍한 재난 상황을 그렸다.

현실 빼닮아 인기, 450만 관객 돌파
후쿠시마 주민들 시사회서 눈물도

기생충 감염 확산을 그린 ‘연가시’(2012, 451만 관객)를 연출했던 박정우(48)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두 편의 영화로 재난영화 전문감독으로 자리잡은 그는 원래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등 코미디영화 각본을 쓴 스타작가 출신이다.

관객들이 정신없이 웃을 때 가장 행복하다던 그가 재난영화로 눈을 돌린 이유는 뭘까. “어느 날부터 사는 것 자체가 재난이란 생각을 했어요. 주변에 넘쳐나는 사건·사고들을 보세요. ‘연가시’를 연출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연가시’ 이후 새로운 재난 소재를 찾던 그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소식을 접한 뒤 “원전 사고가 나면 우리가 훨씬 심각할 텐데, 왜 남의 일 보듯 할까”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자료를 샅샅이 훑으며 시나리오를 썼다.
‘판도라’에서 실세 총리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

‘판도라’에서 실세 총리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

영화에는 재난 상황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정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대통령은 사고를 은폐하려는 ‘실세’ 총리의 위세에 눌려 독자적인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한다. 방사능 피폭을 피해 마을을 떠나려는 주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체육관에 가둬둔 채 도망가는 경찰, 피폭 위험을 무릅쓰고 사태 수습에 나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등은 작금의 현실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영화와 현실이 너무 비슷해 지금의 사태를 예견한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원래는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이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는데, 투자사 요청에 총리로 바꿨습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죠. 민감한 소재여서 청와대와 국정원이 모니터링한다는 말까지 들려 영화화가 불가능할 거란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는 원전이 있는 지자체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이 단체관람을 한 뒤, 원전 안전성 여부를 재점검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에 대해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일본 후쿠시마 주민들이 시사회에서 눈물 흘렸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다.

“후쿠시마 주민들이 일본에선 절대 못 나올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손을 꼭 잡아주더군요. 영화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지만, 우리는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지역이 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면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할 겁니다. 침몰한 배(세월호)도 못 구하는 나라 아닙니까.”

박 감독은 혼란한 시국에 ‘심각한’ 영화로 관객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 것은 미안하지만,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야말로 재난영화의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영화 속 재난을 보며 분노하거나 우려하는 관객이 늘어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기회가 된다면 SF 재난영화도 만들고 싶습니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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