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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정치적 올바름’의 정치학

중앙일보 2017.01.05 00:38 종합 28면 지면보기
양성희 문화부장

양성희
문화부장

예상 밖 결과를 가져온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의 주요 변수 중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란 키워드였음은 알려진 바다. 익히 알다시피 정치적 올바름이란 성·인종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 언사를 바로잡자는 개념.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부적절한 웃음’을 금지하거나 ‘조롱하는 표정’을 식별하기 위한 감시 조직을 꾸릴 정도로 이미 과잉 상태였다.

인권 감수성 지수로 떠오른 ‘정치적 올바름’
과잉을 문제 삼기에 우리 사회 아직 갈 길 멀어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엘리트 정치인들의 말만 그럴듯한, 위선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보수층 유권자들의 반감과 피로도를 파고들었다. 지난해 6월 16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부터 그랬다. 트럼프의 딸 이방카는 “저희 아빠는 ‘정치적 올바름’의 정반대입니다. 아빠는 자신이 생각하는 걸 말하고, 말하는 걸 생각합니다”라고 소개했다.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정치적 올바름을 일부러 거스르는 듯한 입장을 취한 게 트럼프의 최대 인기 요인”이라고 강조한 강준만 교수는 책 『도널드 트럼프-정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온갖 아름다운 말을 하면서도 그걸 지키지 않는 것은 그냥 내버려둔 채 트럼프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만 비난을 퍼붓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게 아니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또 “무한 경쟁과 능력주의에 내던져진 (한국) 청년들에게서 ‘위선의 종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감지되고 있다”며 “한국이라고 트럼프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려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지금 국내에서도 한창 뜨거운 이슈다. 성평등·인권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PC 감수성’을 둘러싼 논란이 잇따른다. 특히 ‘여성’ 이슈가 전면에 서 있다. 장동민·유상무 등 여성비하적 발언이나 웃음코드를 활용한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퇴출되고, ‘가요계의 악동’ DJ DOC의 시국 노래 ‘수취인분명’은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tvN 코미디 프로 ‘SNL 코리아’에서 남성 아이돌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건드린 개그우먼 이세영이 방송에서 하차하는 등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또 문단을 중심으로 문화계 전반에서 터져 나오는 성폭력·성추문 릴레이 고발 사태의 근간에도 이 PC 트렌드가 있다.

이와 함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피로감도 서서히 분출되고 있다. ‘프로불편러’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그것이다. 전문적으로 불편해하는 사람, 교조주의적 PC주의자란 뜻이다. 물론 ‘프로불편녀’ 아닌 ‘프로불편러’로 성별은 지워졌지만 대부분 여성을 겨냥한다.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 같은 경멸적 언사다. 남자 아이돌 김희철은 JTBC 예능 프로 ‘아는 형님’에서 “언니, 이거 나만 불편해?”라며 프로불편러를 비꼬았다. 물론 억지스럽고 무리한 PC 논란 사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 웹진 아이즈가 펴낸 책 『2016 여성혐오 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지난해 대중문화계에서 일어난 여혐 논란은 무려 32건에 달한다. 당연한 듯 벌어지는 여성 외모 품평, 여성의 신체를 오직 성적 대상으로만 한정시키는 것 등이다. 그뿐인가. ‘광주학살’의 주역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여자 혼자 대통령이 돼 신통치 않다. …결혼도 한 번 안 해보고, 애도 (안 낳았다). 역시 그 영향이 있다”고 평해 공분을 샀다. 한 유력 신문은 탈북자 관련 기사에서 탈북자 출신 남성 기자는 ‘탈북기자’로, 탈북자 출신 여성 방송인은 ‘탈북미녀’라고 썼다. 거기에 주변의 경험담을 보태자면 여자 승객에게 “둘이 드라이브하면서 데이트하는 셈이니 택시 기사가 얼마나 좋은 직업이냐”고 말하는 택시 기사도 여럿이다.

미국 보수파들의 말처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헛소리가 너무 지겨워. 그게 나라를 망치고 있어”라고 하기에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다. 아직은 ‘입만 산’ 정치적 올바름의 위선적 행태나 ‘웃자고 하는 코미디에 죽자고 달려드는’ 융통성 없는 태도가 문제인 것보다,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도 종종 지켜지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리고 ‘PC 감수성’이 낮은 사회에선 때론 위선도 필요한 법이다. 또 말 많아서 피곤한 프로불편러라니, ‘말 많으면 빨갱이’와 비슷한 레퍼토리 아닌가.

양성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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