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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냥하고 쏘면 늦는다, 일단 쏘고 겨냥하라

중앙선데이 2017.01.01 00:58 512호 18면 지면보기




초경쟁시대, 스타트업 엔진 단 대기업

42%.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95년 매출액 기준 미국 제조업 500대 기업(포춘 선정) 중 20년 후인 2015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한 기업의 비율이다. 노키아·코닥·모토로라 등 290개 기업이 20년 새 순위에서 사라졌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이후 8년 새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 중 25곳이 탈락했다.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한때 글로벌 조선업계를 이끌었던 기업들이다. 인공지능(AI) 등 정보기술(IT)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기업이 경쟁우위를 지키는 생존 기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최근 IT기술을 기반으로 등장한 스냅챗·오큘러스VR 등 신생 업체가 시가총액 10억 달러(1조2000억원)를 달성하는 데 2년이 채 안 걸렸다. 세계적인 IT 공룡으로 성장한 구글조차 8년이 걸린 것과 비교해봐도 성장속도가 빠르다.



 

[대기업은 고객보다 승진 경쟁에 몰입]

초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내외 기업들은 연초마다 ‘혁신 경영’을 내세우지만 변화의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경영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대기업 관료주의’에서 찾았다. 세계적인 석학 게리 하멜은 저서 『당신의 전략을 파괴하라』에서 “관료주의의 대표적인 외적 형태가 피라미드형 조직”이라고 말했다. 그는 “권력이 최고 상층부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고객이나 환경 변화에 동떨어진 전략을 세우고, 구성원은 승진 경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만 한다”고 분석했다. LG경제연구원 전재권 연구원 역시 “조직이 오래되고 규모가 클수록 혁신은 어렵다”며 “특히 오랜 기간 걸쳐 다듬어진 내부 프로세스, 수많은 이해관계 등으로 의사결정이 지연되면서 제대로 된 혁신을 시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수시로 전체적인 조직 구조의 근간을 흔들다간 구성원의 피로감만 높일 수 있다. 최근 대기업의 안정적인 틀에 스타트업 유전자(DNA)를 결합하는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고객의 마음을 읽고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스타트업의 장점을 혁신 엔진으로 바꾸는 것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소니·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도 잇따라 스타트업 전략으로 미래 먹거리를 찾거나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제품 개발에 스타트업 DNA를 결합한 린 스타트업(Lean Srartup)에 기업들의 관심이 많다. 일본 도요타의 린 제조방식을 벤처 경영에 접목한 용어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가 에릭 리스가 2011년 처음 사용했다.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진 시제품(MVP)을 만든 뒤 시장의 반응을 통해 수정·보완하는 경영 전략이다. 오랫동안 하드웨어 중심으로 성장한 GE가 2012년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신을 꾀할 때 린 스타트업을 반영한 패스트웍스(Fast Works)를 도입했다. GE식 속도 경영이다. 신사업 아이디어가 나오면 내부 검토에 시간을 보내는 대신 10명 안팎의 규모로 팀을 구성해 곧바로 제품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보완하며 제품 개발 속도를 끌어올렸다. 그 결과 주력 제품 중 하나인 HA 가스터빈 개발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했다. 개발 비용도 2조5000억 달러로 과거보다 40% 이상 줄였다. GE는 한 발 더 나아가 퍼스트빌드라는 자회사를 2014년 4월 설립했다. 운영방식은 패스트웍스와 유사하지만 아이디어 발굴 단계부터 외부 전문가와 일반인이 참여한다. 이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퍼스트빌드에 갖춰진 설비로 시제품을 만들었다. 시장 반응이 좋은 제품은 바로 GE에서 대규모로 생산한다.



[소니, 시곗줄에 스마트 기능 넣는 역발상]

워크맨·플레이스테이션 등 각종 전자기기를 내놓은 소니는 1990년대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현재는 애플 등 경쟁사에 치여 과거의 위상을 많이 잃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히라이 가즈오 최고경영자(CEO)도 2015년 7월 린 스타트업을 도입했다. 바로 ‘퍼스트 플라이트(First Flight)’라는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사이트)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대중에게 아이디어에 대한 피드백과 자금 등의 지원을 받아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방식이다. 전재권 연구원은 “소니는 제품 개발에 대한 전반적인 의사결정을 대중에게 맡기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고객의 요구(니즈)를 파악하기 위한 시장 조사, 경영진 보고 등 대기업의 복잡하고 느린 의사결정 단계를 줄여서 혁신을 꾀하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가전박람회 소비자가전쇼(CES)에서 공개한 스마트워치 ‘웨나’가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개발된 제품이다. 역발상 제품으로 박람회 참석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본체는 일반 아날로그 시계고 사용자의 활동량을 측정할 수 있는 가속계를 비롯해 진동 알림, 절자결제 시스템 등 스마트워치 기능은 스트랩(시곗줄)에 들어가 있다.



기업의 각종 문제를 풀기 위해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방법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세안제 ‘도브’로 유명한 세계적인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다. 유니레버는 2014년부터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 ‘파운드리’를 운영하고 있다. 400여 개에 달하는 소비재 브랜드가 직면한 문제를 스타트업 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시하고, 이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낸 곳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유니레버는 스타트업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사업 규모를 늘린다. 예를 들어 유니레버의 식품 브랜드인 ‘크노르’는 아프리카 시장을 넓히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파운드리를 활용했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에 강점을 지닌 디지털지니어스가 내놓은 ‘셰프 웬디’가 뽑혔다. 지역 특성상 인터넷보다 문자 메시지에 익숙한 고객층을 공략한 방법이다.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식자재 목록을 셰프 웬디에게 문자를 보내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통해 레시피와 함께 요리에 활용할 수 있는 크노르 제품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유니레버는 실제로 남아프리카에서 테스트를 해본 뒤 아프리카 전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일단 제품 내놓고 고객 반응 따라 보완]

미래 먹거리 연구에도 ‘스타트업 DNA’을 결합한다. 최근 국내외 기업들은 신사업을 추진하는 별동부대를 만들고 있다. 외부에서 스타트업을 사올 수도 있지만 직접 스타트업(사내 벤처)을 키우면 더 민첩하게 혁신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이 막대한 자금을 쏟는 곳이 스타트업격인 비밀연구소 X다. 이곳은 ‘문샷(moonshot, 실험적인 프로젝트)의 캡틴’이라고 불리는 과학자 아스트로 텔러가 경영을 맡고 있다. 드론을 활용한 음식 배달 서비스, 풍선을 이용한 인터넷 보급 등 X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이다. 무선 통신중계기를 연결한 대형 풍선을 띄워 오지에 무선 인터넷을 공급하는 프로젝트 명칭은 ‘미쳤다’ 뜻의 ‘룬(Loon)’으로 불릴 정도다.



중요한 사실은 공상같은 아이디어가 신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도 자율주행차 프로젝트가 X를 졸업하고 별도 법인 웨이모로 분사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에 따르면 구글의 자율주행차가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시각장애인을 태우고 세계 최초로 실제 도로에서 무인 주행에 성공했다. X가 실험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자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다. 구글이 2015년 8월 지주회사인 알파벳 체제로 개편한 데도 신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다. X를 비롯해 생명연장 기업 칼리코, 구글벤처스 등을 알파벳 산하 자회사로 편입했다. 알파벳 경영을 맡는 구글의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회사는 익숙한 일을 하는 데 안주하려는 성향이 있다”며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스타트업 DNA를 이식하는 방법엔 차이는 있지만 신속하게 고객의 요구(시장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세계적인 경영사상가 톰 피터스가 평소 강조했던 ‘계획보다 실행이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저서 『초우량 기업의 조건』에서 “날마다 새로운 혁신 제품이 쏟아지는 글로벌 경쟁 시장에선 기업들은 ‘준비(Ready)→조준(Aim)→발사(Fire)’가 아니라 ‘준비→발사→조준’의 순서로 경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 교수 역시 “과거 대기업의 방식처럼 시장을 분석한 뒤 철저한 계획에 맞춰 제품(서비스)을 내놓았을 땐 이미 시장 트렌드가 바뀌었을 것”이라며 “먼저 시제품을 내놓은 뒤 고객 피드백을 적극 수용해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린 스타트업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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