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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촛불을 켜자

중앙선데이 2017.01.01 00:08 512호 31면 지면보기
해가 떴다. 정유년(丁酉年)의 새 해가 떴다. 병신년(丙申年)의 참담함과 절망을 넘어 붉은 해가 떠올랐다. 설악산에도, 지리산에도, 한라산에도, 서울의 남산에도 둥그런 해는 다시 떠올랐다.



지난 한 해는 정말 어두운 터널이었다. 돌아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외환(外患)을 당한 해는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 이렇게 철저히 무너진 때가 또 있었던가.


김진국 칼럼

우리는 침체된 세계 경제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의 후유증을 어느 나라보다 무겁게 짊어져야 했다. 급속한 저출산·고령화의 고통까지 한꺼번에 닥쳤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내일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이 정유라의 금수저 자랑이다.



교육과 취업은 마지막 희망이다. 오늘 내가 힘들어도 자식들은 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리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그토록 부러워한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이다. 오늘의 고통을 자식들에게는 넘겨주지 않겠다는 발버둥이다. 그러나 입시는 부정이었다. 성적은 조작이었다. 스포츠에도 권력이 개입했다. 영화와 미술과 음악과… 창조를 강조해 온 예술에도 권력의 검은 손이 끼어들었다. 군대 생활도 줄서기라는 게 드러났다. 서민들은 선생님께 커피 한 잔도 드리면 안 된다는데, 수십억 원의 국민 세금을 퍼주며 성적을 고치는 사람도 있었다.



국민이 뽑은 적도, 시험을 통해 선발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강남 아줌마가 장관 인사를 주물렀다. 장관들이 받아적어가며 국가 정책의 기본으로 삼는 대통령 연설문도 뜯어고쳤다. 청와대 비서관을, 고위공직자를 종 부리듯 했다. 그런데도 공직자는 눈치만 봤다. 심지어 대기업 등치는 것을 도와줬다. 이런 사람들을 믿고 나랏일을 맡겼던가. 오죽하면 ‘이게 나라냐’는 탄식이 나왔을까.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는커녕 공직에 대한 신뢰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해는 다시 떠올랐다. 병신년의 절망을 뚫고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앞을 보기 위해 켜 들었던 1000만 개의 촛불이 모여 붉은 태양이 되어 떠올랐다. 서민에게 고통과 절망과 한숨을 가져다 줬던 적폐(積弊)를 태워버릴 뜨거운 해가 되어 떠올랐다. 이제 우리 가슴 속에 희망의 촛불을 켜자. 다시는 지난해처럼 어이없는 역사의 뒷걸음질을 하지 말자. 바른 길을 밝혀줄 촛불을 켜자. 우리 자식들은 좀 더 공정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1597년, 정유년 9월.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배로 왜군 함대 133척을 맞아 31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명량해전이다. 해군을 없애려는 선조에게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말한 직후다.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동안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궤멸했다. 거북선 3척, 판옥선 100여척, 수군 2만여명이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그때 절망하고, 해군을 없애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산도대첩이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면, 정유재란의 전세는 명량해전에서 뒤집어졌다.



지난해 우리는 칠천량해전 같은 참담한 일을 당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 대통령 주변에서는 국정을 농단했지만 시민들은 희망의 배를 띄웠다. 국가적 위기마다 일어선 현명한 시민의 힘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도약해왔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경제를 일으키고, 4·19와 6월 항쟁의 평화 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외환위기도 금 모으기로 이겨냈던 민족이다.



연 1000만 개의 촛불은 기적을 이뤄냈다. 훈련을 한 것도 아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섰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사불란했다. 물리적 충돌을 스스로 막았다. 집회 이후에 청소까지 했다. 올해 3대륙 정당회의를 추진하고 있는 정의용 아시아정당회의(ICAPP) 사무총장은 “유럽 정치인들까지 광화문 집회를 기적에 가까운 일로 생각하고 서울을 방문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정 능력을 보였다. 정유라의 입시와 성적은 학생들이 문제 삼았다. 정윤회 파일을 힘으로 묻으려 했다. 최순실을 내사하던 이석수 특별감찰관까지 쫓아냈다. 하지만 언론은 진실을 파헤쳤고, 네티즌 수사대는 묻혀진 진실을 끄집어냈다. 권력의 시녀라며 비난받던 검찰이 현직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 우리 사회가 진실을 힘으로 파묻을 수 없을 정도로 성큼 도약한 것이다. 권력자의 부조리는 결국 밝혀지고 만다는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얻었다. 같은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희망을 갖게 됐다. 이렇게 남은 12척의 배에 희망의 촛불을 켜자.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



올해는 정말 중요한 해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탄핵이 없어도 12월에는 선거다. 헌법재판소는 3월쯤 결정을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된다면 60일 이내에 차기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한다. 다른 때보다 급하게 선거를 치러야 한다.



이번에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 돌이켜 보면 언론은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 누가 되면 어떠냐는 마음으로 외면한 사람도 많았다. 촛불을 든 심정으로 검증하고, 투표했다면 어땠을까. 병신년의 수난이 반복되도록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새 대통령을 뽑으면 대한민국이 달라질까. 6월 항쟁 이후 우리 손으로 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지만 과거의 유산은 구석구석 남았다. 어느 틈에 그것이 쌓여 유신시대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바꾸는 촛불을 들어야 한다. 특권과 편법과 부정을 걷어내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이 자기 말을 해야 한다. 광장은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인들도 이것이 시대적 과제라는 걸 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낚시질만 했다. 낚시꾼에게는 대통령 선거건, 국회의원 선거건 표로써 매질을 해야 한다.



부당한 권력의 요구에는 공직자도 할 말을 해야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강자가 약자에 갑질하는 일도 없어져야 한다.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비하고, 청년 일자리, 고령화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야 한다. 소모적인 진영싸움은 제발 그만둬야 한다. 조작된 정보로 억지를 부릴 게 아니라 사실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해야 한다. 올해야말로 그런 나라를 만들 기회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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