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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나쁜 1000조원들이 날뛰는 시대

중앙일보 2016.12.28 18:54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이정재 논설위원

언제 어디서나 말발이 센 건 돈이다. 돈의 말을 잘 읽으면 경제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오늘 말할 돈은 제법 큰 숫자, 1000조원이다. 6년 전 오늘, 나는 ‘1000조원 시대의 개막’이란 칼럼을 썼다. 마침 그즈음 1000조원을 돌파한 국내총생산(GDP)·시가총액·무역액과 가계빚 얘기였다. 앞의 3개, 좋은 1000조원은 2000조, 3000조원으로 늘어나기를, 뒤의 나쁜 1000조원은 쪼그라들어 마침내 없어지기를 기원했다. 단지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6년이 흐른 지금 나라 경제는 후진했고 바람은 거꾸로 이뤄졌다. 1000조원이던 가계빚은 1300조원이 됐고, 무역액은 2011년 1조 달러를 넘어선 뒤 5년째 뒷걸음치고 있다. 경제의 파이(GDP)와 맷집(시가총액)은 늘긴 했지만 예상엔 많이 못 미쳤으며 돈의 쏠림이 심해지면서 나눔의 갈등만 더 커졌다.

가계·나랏빚 임계점인데
정치의 계절 시작이라니

내년 전망은 더 안 좋다. 좋은 돈은 계속 빌빌대고 나쁜 돈은 더 활개를 칠 것이다. 우선 5년 새 훌쩍 커져 1300조원이 된 가계빚이 크게 요동칠 것이다. 예고된 재앙, 미국발 금리 인상이 기다리고 있다. 월가에선 내년에 두세 차례, 약 1%포인트의 인상을 점치지만, 더 오름세가 가팔라질 수도 있다. 2년 내 미국 기준금리가 연 4%를 찍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국 경제가 견딜 수 있는 미국과의 금리 차이는 0.5% 안팎, 그나마 6개월 정도가 고작이다. 현재 1.25%인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2년 새 3%포인트 급등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은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계빚 이자만 한 해 9조원이 늘어날 것으로 봤다.

공급이 넘쳤던 주택 시장은 또 하나의 폭탄이다. 집값이 급락하면 가계빚은 비명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뿐 아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위기 신호가 울린다. 캐나다는 30%, 홍콩은 15% 정도 내년 집값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 충격이 도미노처럼 닥치면 금융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가계부채는 이미 우리 경제의 목젖을 찌른 상태다. 조금만 힘을 줘도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 하나의 나쁜 돈, 나랏빚(D3:총 국가부채)도 지난해 말 1003조원이 됐다. GDP의 64.4%다. 규모도 규모지만 늘어나는 속도가 더 문제다. 이 정부 들어서만 100조원 넘게 불었다. 정부의 대답은 한결같다. “다른 나라와 견줘 아직은 괜찮다”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심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내년은 선거의 해다. 복지로 포장한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질 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짜여도 재정엔 부담이 되기 십상인데 대충 엉성한 얼개만으로 굴러갈 가능성이 크다. 벌써 여야 대권주자들은 수백조원이 들어갈 기본소득제 도입을 말하고 있다.

내년을 노리는 또 다른 1000조원도 있다. 떠도는 돈, 뭉칫돈이다. 정식 명칭이 단기 부동자금인 떠도는 돈은 주로 경제가 어려울 때 몸집을 키운다. 9월 말 현재 한국은행이 집계한 뭉칫돈은 978조2200억원. 1년 새 100조원가량 불어났다. 돈은 평소엔 수익을 좇는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위험이 커지면 달라진다. 수익보다 안전을 찾는다. 아무리 고수익으로 유혹해도 소용없다. 꼼짝 않고 눈치만 본다. 뭉칫돈이 많아질수록 경제엔 안 좋다. 돈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의 혈맥이 막힌다. 한국은행이 지난 2년간 금리를 1.25%포인트나 내렸지만 실물 경제가 꿈쩍도 하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한번 튀면 우~ 몰려들어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뭉칫돈은 경제의 위험이 사라져야 비로소 줄어든다. 경제의 가장 큰 위험은 불확실성이다. 국정 혼란이 이어질 내년은 불확실성이 극대화할 것이다.

이런 나쁜 돈들의 시대를 끝낼 방법은 없나. 새누리당의 경제통 이한구 전 의원은 “해답이 없다”고 끊었다. 지난 몇 년 경제가 많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맘때면 희망을 얘기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사방이 절망뿐이다. 그럴 때 하필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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