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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아이 때문에 꿈도 포기했는데 … 엄마처럼 살기 싫대요”

중앙일보 2016.12.28 00:01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나를 스스
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희생하는 부모가 꼭 현명한 부모는 아냐
‘자녀가 다 클 때까지 참자’는 강박 버리고
작은 일이라도 자신 위한 시간 조금씩 내길


이렇게 또 한 해가 갔다. 오늘은 왠지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민정씨는 세월이 가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서 세월이 가서 아이에 대한 짐을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감격스러운 순간은 잠깐, 생의 모든 것을 내게 의지하는 아이를 돌보는 건 쉽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이의 미래를 망칠 것만 같아 노심초사했다. 그 무렵 직장 분위기도 만족스럽지 않아 과감히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얼굴에 행복이 깃들고, 이 아이가 성공적으로 세상에 나서도록 돕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생각이 들어 두렵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인생은 길다. 이제 평균수명도 아흔이라고 하지 않나? 아이를 잘 키우고 또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내 인생을 돌아보기에는 당장 해야 할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이왕 전업주부를 결심했다면 잘 해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하면 후회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민정씨는 마음 한쪽에서 올라오는 두려움과 불만에는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이가 뛰어다니고, 유치원을 졸업하고, 민정씨는 마침내 학부모가 되었다. 사춘기의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정신없이 입시 전쟁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정보가 많다는 부모와 친분을 맺고, 학원의 실장들과 상담을 했다. 늦은 밤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며 민정씨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실패했다. 민정씨도 실패한 것이다. 아이는 마음 아파하고, 눈물도 흘리고, 화도 낼 수 있지만 민정씨는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다독이고 기운 내라고 격려하고 기분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파도 아파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딸이 던진 한 마디에 민정씨의 마음은 무너졌다. 아무 데나 갈 거라고, 재수해도 잘 되리란 자신이 없다는 딸에게 그동안 해온 것이 아깝지 않으냐며 설득하자 딸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좋은 대학 가면 뭐 해. 엄마처럼 나도 이렇게 집에서 딸 공부나 시킬 텐데.” 그 순간 민정씨는 자신이 한 모든 수고가 시궁창에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민정씨에게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루고 있을 뿐이다. 외국어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민정씨는 번역을 하고 싶었다. 어려운 번역은 엄두가 안 나지만 아이들이 읽는 책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해보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번역이 쉬울 리는 없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란 생각에 민정씨는 마음을 접었다. 우선 아이가 대학이나 붙은 다음에 생각해보자.

그나마 민정씨의 상황이 조금은 낫다. 아이가 대학을 가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정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보면 더 힘들어 보인다. 남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더 오래 미뤄야 한다.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취업이 될 때까지. 아니 결혼을 할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

남편은 늘 이야기한다.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주어진 역할을 하며 버티다 가는 거지.’ 그런 남편의 말이 듬직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아이가 대학을 가도 남편은 민정씨에게 여전히 그 말을 할 것이다. 민정씨 자신을 위한 삶을 시작하지 못하게 할지 모른다. 자신도 희생하니 당신도 희생하라고 말하겠지. 그런데 희생이 인생의 전부라면 인생은 도대체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애써 그 질문을 무시하지만 이 질문이 자꾸만 올라온다. 오늘 아이의 한마디를 듣기 전부터 민정씨는 종종 눈물이 났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다 미루면서 사는 삶이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꾸 생각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찌질하고 궁상맞은 일상을 리얼하게 표현한 송아람 작가의 작품.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끌렸던 도일과 미래는 각자의 연인과 결별 후 떳떳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다. 하던 일도 잘 안 풀리고 꼬이기만 한다. 만화 업계 종사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독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미메시스, 1만5800원.

『자꾸 생각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찌질하고 궁상맞은 일상을 리얼하게 표현한 송아람 작가의 작품.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끌렸던 도일과 미래는 각자의 연인과 결별 후 떳떳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다. 하던 일도 잘 안 풀리고 꼬이기만 한다. 만화 업계 종사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독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미메시스, 1만5800원.

우리는 종종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며 하고 싶은 일을 미래로 미룬다. 그것이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믿는다. 심리학자인 타이비 칼러는 이런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헤라클레스에 비유했다.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과제를 모두 수행한 후에야 올림포스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헤라 여신의 음모로 신들도 해내기 어려운 엄청난 과제가 주어졌지만 그는 왜 이런 과제를 해야만 하는지 묻지 않는다. 주어진 것은 해내야만 하고 행복은 그 뒤에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그는 올림포스로 올라가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만다.

민정씨와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일을 먼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꼭 그래야만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철석같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 속 깊이 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뒤로 미룬다. 미루다 보니 소망도 점점 빛이 바래고 마침내 소망하는 능력조차 사라진다. 한 가지 조건이 이뤄져도 다른 조건을 또 내세우며 뒤로 미룬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있기 마련이다. 아이를 대학에 보낼 때까지, 취업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손자가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런데 꼭 현재를 희생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계획이란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금씩 자기 미래를 위해 시간을 낸다고 상황이 엉망이 되라는 법은 없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강박이다. 그 강박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다. 그저 외부에서 주어진 일만 열심히 처리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내가 끌고 가는 삶이 아닌 남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된다.

민정씨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나? 그렇다면 바로 시작해야 한다. 완벽하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조금씩 시간을 내야 한다. 마음의 준비일 수도 있고, 정보를 모으는 정도일 수도 있다. 수첩이라도 하나 장만해 자기 꿈을 위한 메모라도 적어가야 한다. 그렇게라도 시작해야 한다. 미래를 내 삶에 담고 있어야 우리는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해내고 있다면 미래가 내게 다가오더라도 그냥 지나쳐 가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힘이 다 빠져 어떤 희생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이미 나의 시간은 다 가고 만 것이니까.
서천석은
서천석은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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