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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6)

중앙선데이 2016.10.16 00:02 501호 1면 지면보기

경천사 10층 석탑. 개풍군 광덕면 광수리에 있었다. 개항기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가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중앙포토]



고려인 출신 기(奇) 황후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1333∼68년 재위)의 제2비(1340년)를 거쳐 정후(正后:1365년)가 된다.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은 황태자(1353년)로 책봉된다. 기 황후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는 제후인 영안왕(榮安王)에 봉해진다.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과 결합해 원나라와 대(對)고려 외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씨가 정후로 된 지 수년 만에 원나라가 망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원나라 쇠망의 책임까지 뒤집어쓴다. 이는 기 황후가 당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66- 공민왕

?기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기 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貢女) 출신이다. 원나라에 처녀를 바치기 위해 처녀들의 국내 혼인을 금지한 1275년(충렬왕 1)의 기록이 공녀(貢女)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후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가장 많은 숫자를 보낸 때는 동녀(童女:처녀) 53명과 화자(火者:거세된 환관) 23명을 보낸 1320년(충숙왕 7)이다. 명문가의 처녀를 요구했고, 딸을 숨기거나 바치지 않은 관리들은 유배 같은 처벌을 받았다. 기 황후의 고조부는 최충헌 정권 때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음서로 관료가 되어 수령을 지냈다. 그녀 역시 공녀의 조건에 들어맞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 1333년(충숙왕 복위2) 6월 즉위한 순제는 이해 9월 권력자 연철목아(燕鐵木兒)의 딸 답납실리(答納失里)를 정후(正后)로 맞이한다. 기 황후는 이해 12월 고려 출신 환관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된다. 이후 곧 순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는다. 1335년 6월 순제 폐위 역모사건을 주도한 연철목아와 그 아들 당기세 형제가 살해되고, 답납실리 황후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기 황후에겐 좋은 기회였다. 기 황후를 정후로 맞이하려 한 순제의 뜻과 달리 1338년 3월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해 온 홍길자(弘吉刺) 가문의 백안홀도(伯顔忽都)를 정후로 받아들인다. 대신 1340년 3월 기 황후는 제2 황후로 책봉된다. 그러나 정후 백안홀도는 명목상의 제1 황후에 불과했다. 기 황후는 이때부터 권력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1365년 12월 기 황후는 제1 황후가 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원나라 멸망 3년 전이었다. 기 황후의 품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기황후는) 일이 없으면 여효(女孝:孝經의 일종?), 경전 및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고 역대 황후 가운데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보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신을 시켜 태묘에 보내 먼저 제사를 올린 후에야 그것을 먹었다.”(『원사』 열전)



기록에 따르면 기 황후는 미모뿐 아니라 교양이 풍부하고 지적으로 세련된 여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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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금강산 장안사. 기 황후의 원찰. 6·25전쟁 때 소실됐다. [사진 간송미술관]



1340년 12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자 원나라는 황후의 각종 비용을 전담하는 재정기구로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한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정국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기 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기용해 자정원을 운영했다. 최고책임자인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전주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기용했다. 고용보는 개경 경천사에 10층 석탑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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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황후는 원나라 쇠망기에 정국을 주도하다 보니 그녀가 망국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자신과 일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도 그런 비난을 증폭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고려의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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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신당.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 귀퉁이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용철 기자



공민왕은 원나라 요청에 따라 1354년(공민왕 3) 대륙의 한족(漢族)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탁·염제신·최영 장군 등에게 고려군 2000명에다 현지 고려인 2만 명을 붙여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를 상세하게 보고한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 정세를 읽고 기철 등을 제거했다. 쇠망의 길로 접어든 원나라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공민왕은 꿰뚫어 본 것이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을 반역을 꾀했다는 죄로 처단한다. 기철은 기 황후의 오빠이다. 권겸은 원나라 황태자(기 황후 아들)의 장인이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순제에게 바쳤다. 세 사람 모두 원나라 황실의 일족이 되어 고려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린 인물들이다. 공민왕은 세 사람과 그 일족을 처단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유명한 반원(反元) 개혁을 단행한다. 이해 6월 공민왕은 인당(印?)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 이동·이서 지역의 원나라 역(驛) 8곳을 공격하게 한다. 7월엔 쌍성(雙城)총관부를 점령함으로써 약 100년 만에 원나라에 빼앗긴 동북 지역(※함경도 일대)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다.

신당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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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황후 모녀가 각각 제 2황후와 영안왕 대부인으로 책봉되면서 당시 국왕 충혜왕(1330∼1332년, 1339∼1344년 재위)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충혜왕이 1339년 11월 부왕 충숙왕이 사망해 두 번째로 즉위한다. 그런데 4개월 후인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한다. 8년 전 순제를 제거하려 한 연철목아의 후원을 받은 충혜왕은 기 황후의 등장으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충혜왕은 이해 3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원나라에 파견한다. 또한 기 황후의 재정기관인 자정원(資政院) 책임자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이듬해(1341년) 2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으로 책봉한다. 충혜왕이 기 황후의 환심을 얻어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다. 이러한 충혜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기 황후 일족을 중심으로 한 부원(附元) 세력이 고려에서 활개를 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 황후 역시 충혜왕 재위 동안 자신의 일족이 고려에서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정국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철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8월 충혜왕이 음란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원나라에 올린다.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에 기용된 지 불과 3년 만에 기철은 국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정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결국 충혜왕은 이듬해(1344년) 기 황후의 측근 환관 고용보에 의해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어 왕위를 잃는다.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유배 도중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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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의 8살짜리 아들 충목왕이 즉위한다. 환관 고용보가 그를 안고 황제에게 선을 보인 후였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충정왕을 내세웠다’(『고려사』 권38 공민왕 총서)고 한다. 기 황후 일족이 고려 국왕 임명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다. 이때 20세의 공민왕은 나라 사람의 신망을 받는 훌륭한 제왕의 자질을 지녔으나 두 번이나 국왕에 임명되지 못했다. 충정왕이 재위 약 2년 만에 죽자 그때야 즉위한다.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이 높은 신망을 받고도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역시 원나라 공주 소생의 자식이 아니라는 혈통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형인 충혜왕의 죽음을 목격했고 3수(修)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과 기 황후 일족의 관계는 원만할 수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원나라의 쇠망과 맞물려 큰 저항 없이 단행되었다. 기 황후는 일족과 측근이 제거되자 황제와 태자에게 복수를 요청한다. 고려 출신 원나라 고위 관료 최유(崔濡)는 기 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한다. 1363년(공민왕 12) 5월 고려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는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요새에 군사를 배치한다.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1363년(공민왕 12) 6월 고려를 침공했으나, 이듬해 1월 마침내 패배한다.



1364년 5월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 덕흥군 옹립과 공민왕 폐위에 앞장선 인물들의 처단을 통보하면서, 6월엔 공민왕을 다시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고려가 신흥 한족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4년 후 원나라는 신흥국 명나라에 쫓겨 몽골 지역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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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53호 2013년 12월 15일, 제354호 2013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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