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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나온 눈, 큰 귀 5000년 전 파촉 유적 황하 문명과 큰 차이

중앙선데이 2016.10.16 00:44 501호 23면 지면보기

1986년 발굴한 삼성퇴 유적의 청동제 마스크. 동시대 북부 청동기와는 전혀 다른 재질, 양식이라 중국 문명 기원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진 유물이다.



1948년에 발표한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시집이 있다. 『귀촉도(歸蜀道)』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귀촉도’라는 시의 첫 구절은 매우 애달프다. 한국인 특유의 정한(情恨)을 담았다고 해서 퍽 유명하다. 그 시작은 이렇다.


[대륙의 風雨… 중국 인문을 읽다 -19-] 문명의 새벽 ②

 



‘눈물 아롱아롱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나이 지긋한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을 통해 한 번쯤은 배웠던 시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삶, 떠나보내는 이의 애절하며 간절한 심사가 녹아 있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저 멀고 먼 저승을 ‘파촉(巴蜀) 삼만리’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 파촉이라는 곳은 중국 서남부 지역의 현재 쓰촨(四川)을 가리키는 단어다. 시의 제목인 귀촉도 또한 그곳에서 생겨나 그곳 사람들에게 줄곧 전해져 온 설화에 바탕을 둔 말이다. 시인에게 이런 영감을 안겨다 준 쓰촨 지역의 설화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귀촉도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보면 소쩍새로 나온다. 다른 이름은 자규(子規)·불여귀(不如歸)·접동 등이다.



 

중국 쓰촨을 나중에 점거해 중국 판도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이들은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 등이다. 사진은 제갈량이 유비 사후에 북벌을 감행하며 넘었던 쓰촨 북부의 검관(劍關).



 [두우의 설화 담은 청동기 유물 발굴]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파촉에 고촉(古蜀)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 이름은 두우(杜宇), 제호는 망제(望帝)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다. 그는 옛 임금이 다 그렇듯이 치수(治水)가 큰 걱정이었다. 어느 날 강가를 거닐던 그의 눈에 시신 한 구가 보였다.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이었다. 건져 올린 시신은 그러나 시신이 아니었다. 금세 깨어났으니 말이다. 임금 두우는 그에게 물었다. 죽었다가 깨어난 그 사람은 “가끔 물에 빠져 죽었다가도 깨어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거, 참 이상한 녀석이군…’이라면서도 임금 두우는 물에 빠져도 죽지 않는 그에게 치수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 그 이름은 별령(鼈靈)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이다. 이런 저런 곡절을 거쳐 결국 두우는 별령에게 나라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



숲속에 들어가 원통함을 못 이겨 울고 또 울었다는 두우의 울부짖음이 불여귀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를 끊임없이 외쳤던 셈이다. 아울러 촉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울음소리는 또한 귀촉도로도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울다가 또 울다가 결국 죽는다. 그의 넋은 마침내 귀촉도·불여귀라는 이름을 얻었던 소쩍새로 환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쩍새의 다른 이름은 두견(杜鵑)이다. 그가 숲에서 울다가 토한 피는 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두우의 이름을 닮은 두견화(杜鵑花), 곧 진달래의 다른 이름이다.



한반도의 시인 서정주에게 강렬한 모티브를 제공했던 이 설화는 물론 지금의 중국 땅에서 나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를 ‘메이드 인 차이나’로 내세울 수 있을까. 땅으로 보자면 그렇게 주장해도 큰 탈이 없다. 그러나 옛날 옛적의 고촉이라는 나라와 두우라는 임금, 그곳에서 만들어진 귀촉도의 설화는 중국인들이 자신 있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1986년 이곳에서는 충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다. 땅 위로 올라오는 유품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눈, 커다란 귀, 기괴하다 싶은 얼굴 모습의 청동기 때문이었다. 이들 청동기 마스크는 전통적으로 중국이라고 불렸던 북부 중국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이었다. 유사한 측면도 전혀 없었다.



 

쓰촨 청두(成都)에 복원한 옛 거리 모습이다. 쓰촨은 약 5000년 전 북부 중국과는 매우 다른 문명의 요소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은나라와 같은 시기에 다른 문명 꽃피워]청동제 마스크의 모습이 워낙 기괴해 이들이 땅 위에 출현한 뒤에는 “외계(外界)의 문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지구 바깥의 다른 행성에 살던 외계인들이 전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물론 과장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쓰촨에서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던 이들 청동제 마스크의 주역은 중국 북부와 친연성을 따지기보다는 인도나 이집트의 문명적 요소에 훨씬 더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는 중국에서 ‘삼성퇴(三星堆) 유적’으로 불린다. 1986년 7월에 발굴을 시작하면서 각종 청동기와 옥기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쓰촨의 행정중심인 청두(成都)로부터 자동차로 약 40~50분 거리에 있는 광한(廣漢)이라는 곳이 소재지다. 높이 3m에 육박하는 청동제 서 있는 사람의 상을 비롯해 기이한 모습의 청동제 마스크 등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추정하는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5000년 전이다. 중국 북부의 황하(黃河) 문명 등을 계승했을 것으로 보이는 은(殷)에 비해 다소 앞서거나 적어도 동시대의 유물로 추정한다.



이 시기에 지금의 중국 땅 북부와 서남부에 존재했던 청동기 문명은 서로 다르다. 같은 점은 거의 없고, 다른 점만 유독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청동기의 재질이나 양태 등은 북부와는 관련이 전혀 없는 것으로 추정한다. 오히려 인도 등 중국 서부 지역의 문명 요소와 유사한 재질과 형태를 드러낸다.



눈에 띄는 유물이 또 있다. 대량의 상아(象牙)다. 발굴과정에서는 약 80개의 상아가 나왔다. 큰 것은 1.8m에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4000~5000년 전의 중국 서남부에는 코끼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상아가 나오는 일 자체는 특기할 만한 점이 많지 않다.



그러나 상아의 길이가 1.8m에 이른다는 점은 문제다. 이는 흔히 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아시아 코끼리의 상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아시아 코끼리의 상아 최대 길이는 1.5m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삼성퇴 유적에서 나온 상아의 일부는 아프리카 코끼리에서 얻은 것으로 본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에서는 삼성퇴 유적의 주인공들이 외부에서 이곳으로 유입했거나, 적어도 독자적인 문명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 서부의 인도, 나아가 고대 이집트 등과 무역 등 적지 않은 교류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이었으리라고 본다. 이 삼성퇴 유적과 가장 가까운 형태의 것이 ‘금사(金沙) 유적’이다. 역시 쓰촨의 행정중심인 청두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시기는 약 3000년 전으로 삼성퇴 유적의 후예들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금사 유적지에서는 삼성퇴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 특히 금박을 입힌 지팡이 등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런 금박의 전통은 이집트 문명과 특히 친연성을 지닌 요소다. 따라서 삼성퇴와 금사 유적 등은 중국 북부에서 발원한 황하 문명과는 매우 이질적인 면모를 보이며 오히려 중국 서쪽의 문명과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삼성퇴와 금사 등이 정확하게 어디서 발원한 문명의 일부인지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삼성퇴와 금사 유적 유물 등으로 ‘옛날 옛적의 중국’에는 북부와는 분명히 다른 문명의 요소가 자리를 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들은 흔히 옛 촉나라라는 뜻의 고촉국(古蜀國)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각종 문헌에 등장한다. 특히 소쩍새·진달래꽃이 등장하는 망제(望帝) 두우의 설화가 대표적이다. 마침 두우에 관한 다양한 판본의 설화 한 토막에는 그의 생김새가 나온다. “눈이 툭 튀어나오고, 커다란 귀를 지녔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1986년에 이르러 비로소 땅 위에 나온 삼성퇴의 수많은 청동제 마스크와 관련이 있다. 청동제 마스크의 튀어나온 눈, 커다란 귀 때문이다.



 



[몽골·동북 지역에도 낯선 문명이 등장]삼성퇴는 현재 중국의 땅인 쓰촨 일대가 본래 자연스런 중국의 땅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곳은 북부 중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문명요소를 지닌 사람들의 땅이었다. 삼국시대가 열려 유비(劉備)와 관우(關羽)·장비(張飛)·제갈량(諸葛亮) 등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촉한(蜀漢)을 세웠던 것은 삼성퇴로부터 적어도 3000년 뒤의 일이다. 중국의 최초 통일 판도를 만들어 이곳을 상징적으로 점령해 통치했다고 하는 진시황(秦始皇)의 그림자도 삼성퇴 유적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낸 지 약 2500년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중국을 예전의 중국과 비교하면서 시각 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앞 회의 글에서 소개한 내용이 중국 동남부에 일찌감치 자리를 틀고 왕성하게 활동했던 도작(稻作) 문명의 주역인 하모도(河姆渡) 문화와 그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이 종국에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정보는 아직 부족하다. 그럼에도 일찌감치 중국 도작 문명의 싹을 틔운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에 비해 다소 늦은 시기에 등장한 사람들이 삼성퇴와 금사 유적의 주인공들이다. 중국 서남부 쓰촨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면서 아주 기이한 모습의 청동제 마스크,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금박의 기술을 선보였던 사람들이다.



중국 문명의 아주 이른 새벽은 그래서 낯설다. 아주 낯선 이질적인 요소들이 제 나름대로 몸집을 키워가며 다양함을 구가(謳歌)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주장해왔고, 아직 상당수가 역설하고 있는 ‘황하 문명 단일 기원’의 설은 이제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중국 문명이 몸집을 갖춰가기 한참 전의 모습은 비단 중국 동남부와 서남부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광역으로 지금 중국 땅 곳곳에는 낯선 문명의 요소들이 등장한다. 광막한 초원과 울창한 삼림이 병존했던 지금의 내몽골과 동북지역에도 낯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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