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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숨겨놓은 비경

중앙선데이 2016.10.16 00:28 501호 27면 지면보기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한 ‘디아벨리 변주곡’ 음반.



명곡과의 인연으로 음악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골트베르크(Goldberg)가 대표적이다. 1741년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외교관 카이저링크 백작은 라이프치히 방문길에 바흐를 만나 불면증 치료를 위한 음악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바흐는 자신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 준 귀족을 위해 ‘2단 손건반을 가진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변주’를 작곡해 줬다. 백작은 당시 14세에 불과한 연주 하인 골트베르크에게 옆방에서 이 곡을 연주하게 하고 편안히 잠을 잤다고 한다.


[an die Musik] 디아벨리 변주곡

이 곡은 언제부턴가 ‘골트베르크 변주곡’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카이저링크 변주곡’도 아니고 ‘라이프치히 변주곡’도 아닌, 무명의 소년 연주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몇몇 작곡가, 연주가를 제외하면 음악애호가에게 가장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물론 골트베르크가 이렇게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공이 크다. 그가 1955년 녹음한 ‘골트베르크 변주곡’ 음반은 오늘날까지 클래식 음반 최대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을 후원한 덕분에 이름을 남겼다. 피아노 트리오 중 최고의 걸작인 베토벤의 ‘대공’은 그에게 헌정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아들이니까 골트베르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막내로 태어난 데다 몸이 약해 성직에 몸을 담다가 이른 나이에 죽었다. 베토벤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리히노프스키, 라주모프스키 같은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베토벤을 후원하지 않았다면 그런 ‘스키’들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안톤 디아벨리(1781~1858)는 후원자도 아니었지만 베토벤의 주요 작품에 이름이 붙어있다. ‘디아벨리 왈츠 주제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op 120’이 그것이다. 디아벨리는 작곡에 소질이 있었고 음악교사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성공한 분야는 음악 출판업이었다. 1818년 빈에서 음악출판사를 창업해 주로 슈베르트의 작품을 간행하면서 다른 출판사들의 경영권도 사들였다. 이듬해에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띄웠는데, 빈의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그가 작곡한 왈츠 주제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을 하나씩 받아서 대형 공동작품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



가장 유명한 베토벤이 당연히 포함되었고 모차르트의 아들, 슈베르트, 루돌프 대공, 훔멜, 체르니, 열한 살의 리스트에게도 작곡을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50명 가량이 응했다니까 디아벨리의 수완이 보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토벤은 처음에는 출판업자의 제안을 들은 체도 안 하다가 1823년까지 무려 33곡의 변주곡을 작곡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피아노곡으로 남겼다. 결과적으로 디아벨리의 프로젝트는 베토벤 작품이 1부, 나머지 작곡가들 작품들이 2부를 이루고 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은 베토벤만 연주한다. 빈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기록의 책임을 느꼈는지 나머지 작곡가들의 변주곡들도 모두 연주한 음반을 남겼다.



‘디아벨리 변주곡’은 베토벤 창작활동의 절정기에 탄생한 명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길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명성에 가려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아벨리는 골트베르크의 아들이다. 베토벤이 출판업자의 제안을 무시하다가 기나 긴 변주곡 작곡의 대장정에 나선 것은 바흐를 의식했기 때문인 게 분명하다. 골트베르크 변주곡이 두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모두 32곡인데,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주제를 바탕으로 33개의 변주곡을 지었다. 딱 하나가 더 많다. 존경하지만, 선배를 이기고 싶은 마음 아니었을까.



비유하자면, 골트베르크는 북한산 둘레길을 걷는 것 같다. 편안한 길을 따라가다가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진다. 전망대에 앉아 한참을 쉬기도 한다(25변주곡). 그리고는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다.



디아벨리는 깊은 숲이다. 정해진 길이 없고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헤맨다. 놀란 새가 푸드득 날아오르고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타기도 한다. 고요한 연못에 이르면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 잊고 해가 기울도록 쉰다(29·30·31변주곡).



둘레길은 멋지지만 가끔은 길을 벗어나 홀로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다. 베토벤은 그곳에 찾는 사람만 볼 수 있는 비경을 숨겨두었다.



처음 접한 음반은 알프레트 브렌델의 1976년 런던 실황이다. 고난도의 대곡을 실황으로 연주하고 음반으로 내다니 대단하다. 두 번째는 프리드리히 굴다의 1970년 스튜디오 녹음이다. 가장 템포가 빠른 연주 중 하나다. 달리는 쾌감과 휴식의 고요함이 뚜렷하다. 두 음반을 반복해서 듣다가 골트베르크로 돌아가 보니, 좀 심심하다. 바흐와 베토벤, 난형난제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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