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性的 대상화 머물던 여성 등장 인물 드디어 저항 나서다

중앙선데이 2016.10.09 00:32 500호 26면 지면보기




이광수에서 한강까지-한국문학의 젠더 감수성

한국 문학과 여성혐오를 연결짓는 최근의 논의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낙인의 효과는 치명적이며, 한국문학의 자산들을 하나의 윤리적 척도로 재단하는 폭력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더 견고한 폭력은 익숙하고 본래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제도화된 폭력이다. 한국문학과 여성혐오라는 논의가 비약과 폭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보다 먼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의 보이지 않는 폭력과 혐오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여성혐오(misogyny)라는 개념이 여성에 대한 멸시와 편견, 차별과 폭력 등을 포함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문제라면, 한국문학사는 오래된 혐의가 있다. 문학이 제도로서 정립되던 근대문학의 초기부터 여성혐오는 형식과 시스템으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문학은 남성 중심적인 계몽담론 안에서 여성적인 글쓰기를 주변화했다. 남성 중심의 문단은 여성을 ‘여류’라는 이름의 예외적인 존재로 타자화했다. 사회와 문단의 남성적 지배질서는 ‘신여성’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근대 도시의 ‘풍경으로서의 여성’은 매혹과 혐오라는 이중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증오의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여성혐오는 여성을 ‘좋아하는 방식’의 문제다. 한국문학에서 여성을 욕망하는 방식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문학은 거의 없다.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로 일컬어지는 이광수의 『무정』은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지만, 남성 주인공 이형식의 관점에서 ‘초점화’되는 서술 방식은 ‘보여주기’로서의 근대소설의 핵심이다. 형식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정』은 남성 주인공의 관점에서 여성인물들을 대상화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야기할 때에 하얀 이빨이 반작반작하는 것과 탄식할 때에 몸을 틀며 보일 듯 말 듯 양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못 견디리 만큼 예뻤다”와 같은 표현은 남성에 대한 묘사에서는 나올 수 없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은 여성 존재를 신체의 세부와 사물로 기호화한다. 이 익숙한 페티시즘( Fetishism)은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것이며 근대적인 것의 일부다.



형식이 바라보는 두 여성, 저 유명한 영채와 선형은 이후 여성 인물의 스테레오 타입이 됐다. 장로의 딸이자 신여성인 선형의 순결성과는 달리, 영채는 은인의 딸이자 온갖 고초를 겪은 기생 신분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복잡하다. 두 여성의 신체를 묘사할 때 유독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이 소설에서, 형식은 여성의 ‘얼굴과 태도’를 중요한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형식의 앞에는 선형과 영채가 가지런히 떠 나온다. 처음에는 둘이다 백설 같은 옷을 입고 각각 한 손에 꽃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백설 같은 옷을 입고 각각 한 손에 꽃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형식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손길을 펴서 형식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두 처녀는 각각 방글방글 웃으며, ‘형식 씨! 제 손을 잡아주셔요. 예’하고 아양을 부리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중략) 이윽고 영채의 모양이 변하여지며 그 백설 같은 옷이 스러지고 피 묻고 찢어진 이름도 모를 비단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째어진 데로 피 묻은 다리가 보인다.”



형식의 남성 판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영채의 신체적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훼손된 이미지를 뒤집어쓴다. 구시대의 인물인 영채의 성적 매력과 순결성의 훼손, 선형의 순결성과 신여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표상의 차이에서, 선형으로의 선택은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계몽적 가치 체계 아래의 욕망의 수준에서 형식의 선택은 불가능하며, 이런 이율배반은 낭만적이고 숭고한 사랑에 대한 윤리에서 구시대의 이념과 식민성을 분리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금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완전한 (남성) 주체에 대한 추구는 전근대적인 여성관과 남성 주체의 욕망 사이의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다. 감정의 해방이라는 계몽적 구호는 전근대적인 도덕적 우월의식과 기형적으로 결합하며, 이는 이광수가 추구한 지사적 남성 주체의 자기기만을 암시한다.



『무정』이 보여주는 젠더 감수성의 이러한 자기모순에도 불구하고 『무정』의 기념비적인 모더니티가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무정』의 모더니티는 계몽적인 언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욕망의 배치를 보여주는 소설 언어의 문제이다. 『무정』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100여년의 시간동안 한국문학의 젠더 감수성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또 다른 영채와 선형이 얼마나 무수히 등장했는가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여성에 대한 대상화 방식의 오인과 억압의 구조는 해소되지 않은 채, 이광수의 자기기만적인 젠더 감수성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낭만적 사랑을 내세우는 문학이나, 모성의 신화에 기대는 서정적인 문학도 마찬가지였으며, 혹은 민족과 공동체의 문제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문학이나, 새로운 세대의 도시적인 감수성을 드러내는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부장제가 승인하는 ‘여성다움’에 갇혀있는 ‘여류 문학’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올해 한국문학의 최대 이슈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일 것이다. 노벨상을 비롯한 타자의 인준에 목마른 한국에서 이 수상에 대한 반응은 과장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문학장의 일부에서는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인가’라는 질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상 작가가 ‘대가’로 지칭되는 ‘남성-리얼리즘’ 작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은 기이하고 불편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남편의 시점으로 구성된 중편 『채식주의자』에서 남편은 갑자기 채식을 고집하는 아내를 이해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한다. 여성 주인공의 내적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타인의 시선이 내재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영혜의 투쟁은 거의 필사적이다. 남편은 어쩌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겠지만,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평범함은 잠재적인 폭력성을 의미할 수 있다. 육식은 남성 중심적인 체제에서 인간과 동물의 위계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가족과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들과 정상적인 것들의 질서를 상징하기도 하다.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라는 가족의 저주는 그 폭력의 핵심이다. 먹고 먹히는 것을 원리로 하는 육식 문화는 가족과 사회라는 질서를 떠받치는 일상의 규율로 내면화되어 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에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영혜가 발설하는 독백과 웅얼거림은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분열증적인 언어, 그 질서를 거부하려는 여성적 육체의 언어이다. 채식은 다수성과 정상성의 폭력을 드러내게 만드는 장치이면서, 자발적으로 사회의 타자가 되려는 ‘식물적인’ 저항이다.



『채식주의자』를 페미니즘 혹은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그 미학적 독특함을 제한하는 것이지만, 예외적인 미학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소설에서 ‘여성성=채식주의’라는 이미지가 여성성에 대한 또 다른 억압적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우려가 영혜의 투쟁이 갖는 젠더 정치성의 문제를 지우지는 못한다. 영혜의 채식주의에 대한 가족과 사회의 시선은 가부장적 질서의 내재된 폭력성이 폭로되는 지점이다. 지금 한국문학은 ‘여기까지’ 와있다. 그것은 한강 작가 혼자의 고투의 결과가 아니라, 왜곡된 문학제도를 뚫고 싸워온 많은 여성 작가들의 지난 100년 동안의 끈질긴 투쟁의 소산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 퀴어 서사와 무성(無性)적인 글쓰기에서 한국문학의 젠더 감수성은 또 다른 차원에 진입하고 있다. 바야흐로 젠더 감수성의 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젠더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한국문학은 폐기해야 할까? 어쩌면 남성 작가가 쓴 한국문학의 정전들은 ‘다시’ 평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성찰적인 지점은 젠더의 문학사라는 측면에서 한국문학을 재구성하는 일이며, 왜곡된 젠더 시스템이 어떻게 자기기만과 미학적 착종을 만들어내는가를 분석해내는 일이다. 남성 비평가인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여성을 ‘좋아하는 방식’의 잠재된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 남성은 없다. 상대를 지배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남성다움의 강박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남성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로 이런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이 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를 내면화하지 않기는 또한 얼마나 어려운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어렵게 암시하는 문학은,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뒤흔들고 불편하게 만든다. 발설하지 못하는 것을 발설하는 것, 저 기이한 ‘여성의 말’을 듣기 시작하는 것, ‘우리’가 도래할 독자가 되는 것은, 젠더 질서의 제도화된 폭력과 결별하는 최소의 출발점이다. 한국문학은 그것을 겨우 ‘시작’하려 한다.



 



이광호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