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전서 패배한 장제스, 천씨 형제를 속죄양 삼아

중앙선데이 2016.10.09 00:28 500호 28면 지면보기

영구 귀국한 천리푸(왼쪽 둘째) 일가를 장징궈(서있는 사람·오른쪽 둘째)가 직접 맞이했다. 맨왼쪽은 장제스 사후 총통을 역임한 옌자간(嚴家간). 1969년 가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29일 전시 수도 충칭(重慶),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국·공 양당이 대좌했다. 국민당 특무조직을 이끌던 천리푸(陳立夫·진립부)는 반대했다. “공산당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대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8-

43일간 계속된 담판기간 중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여러 사람을 방문했다. 반공의 상징인 천리푸도 직접 찾아갔다. 두 번 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는 천리푸가 문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20년 전, 우리는 북방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합작했다. 평생 잊지 못할, 황홀한 순간이었다.” 천리푸도 주저하지 않았다. “전부터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수입품이다. 중국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 쑨원(孫文·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쑨원이 제창한 연아(聯俄·소련과의 연합), 연공(聯共·공산당과의 연합), 부조공농(扶助工農·노동자 농민과 서로 돕고 의지하자)을 거론했다. “우리는 쑨원의 의지대로 국·공합작에 동의했다. 국민당은 딴 길로 갔다. 반공을 주장하고, 공산당 소탕에 집착하며 노동자와 농민을 압박했다.” 온갖 수단 동원해 공산당을 사지(死地)로 몰았다는 말도 했다. “10년간 너희는 다섯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홍군을 장정(長征)길로 내몰았다. 공산당이 더 성장한 이유를 생각해 봤는지 궁금하다.”



천리푸가 말을 막았다. “항일전쟁을 위해 우리는 다시 합작했다. 공산당은 그 틈을 타 세력을 확장했다.” 마오쩌둥은 일어날 채비를 했다. 선 채로 한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 “국민당이 공산당 소탕에 머리를 싸매지 않았더라면,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을 침략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천리푸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하에 숨어있는 공산당원만 파냈다”]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천리푸를 예방했다. 시종 웃었지만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지하조직 이끌던 시절을 회상했다. “선생이 공산당원을 도살할 때 나는 지하생활을 했다. 한번은 선생의 부하들이 닥치기 5분 전에 몸을 피했다. 본업에 충실한 선생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천리푸도 웃었다. “나는 광산일이 소원이었다. 땅속에 매장된 석탄을 원 없이 파내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지하에 숨어있는 공산당원만 파냈다. 파내도 파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도 본업에 충실한 사람이다. 도망 실력을 존경한다.”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은 대륙에서 철수했다. 대만(臺灣)에 정착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책임을 회피했다. “실패를 교훈으로 삼자”며 국민당 개조를 서둘렀다. 속죄양을 찾았다.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 형제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1950년 7월 26일 발표한 국민당 ‘중앙 개조위원’ 명단에 형제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장제스가 천리푸를 불렀다. “가족과 함께 대만을 떠나라. 부르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천커푸는 동생을 위로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라. 생업에 힘쓰면 밥을 굶지 않는다.”



동생이 떠나자 천커푸는 폐병이 악화됐다. 돈이 없다 보니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의 금융기관까지 장악했던 사람이 치료비조차 없다니! 천치메이( 陳其美·진기미)의 조카로 손색이 없다”며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 함께 타이중(臺中)에서 투병 중인 천커푸를 찾아갔다. “돈 걱정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직접 연락해라.”



 



[천리푸에게 무릎 꿇고 통곡한 장징궈]국민당 부총재 천청(陳誠·진성)과 장징궈가 치른 천커푸의 장례식은 대만을 들었다 놓을 정도였다. 장제스도 두 차례 빈소를 찾았다. 황제들이 황태자를 잃었을 때 쓰던 “痛失元良(통실원량)” 4자로 애통함을 드러냈다. 미국에 있던 천리푸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형의 죽음을 알렸다. 귀국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천리푸는 빌린 돈으로 작은 양계장을 운영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요청으로 중국 문화를 강의하고, 틈만 나면 중국 고전에 매달렸다. 1961년 2월, 장제스의 전보를 받았다. “부친이 위독하다. 귀국해라.”



10여 년 만에 대만에 온 천리푸는 장제스에게 귀국인사를 갔다. 장제스는 냉담했다. 부친의 장례를 마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 후, 미국에 머무르던 전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이 대륙으로 돌아가자 장제스는 천리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해라.” 천리푸는 총통이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몰랐다. 장제스의 생일이 오기까지 기다렸다.



천리푸는 장제스의 80회 생일이 임박하자 귀국했다. 장제스는 천리푸를 자신의 옆방에 묵게 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40년 전, 황푸군관학교에서 너를 처음 만났다. 커푸도 세상을 떠났다. 너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어서 무슨 얼굴로 네 삼촌을 대하겠느냐. 이제는 대만에 정착해라.”



1969년 말, 천리푸는 19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청산했다. 장제스가 유엔대사와 일본대사 등을 권했다. 천리푸는 “중국은 문화통일이 시급하다. 총통부 고문 자격으로 문화부흥 운동을 하겠다”며 거절했다.



1975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영전을 지키던 장징궈는 천리푸에게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형님과 저 둘뿐입니다. 모든 지도 바랍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장징궈는 죽는 날까지 천리푸에게 온갖 예의를 다했다.



2001년 2월 8일. 천리푸가 세상을 뒤로 했다. 대륙도 가만있지 않았다. 신화사(新華社)가 전국의 언론기관에 통보했다. “중국의 문화통일에 헌신하던 천리푸 선생이 타이중에서 향년 101세로 서거했다.”



남자건 여자건 말년이 좋아야 한다. 천리푸는 말년이 좋았다. 대륙의 언론들도 천리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표현은 삼갔다.



 



김명호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