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구나 과거 응시, 10만 양병… ‘조선 혁신’ 주장한 율곡

중앙선데이 2016.10.02 00:44 499호 23면 지면보기

1 강릉 오죽헌을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 문이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문이다.



선조의 정신이 서려있는 유적지 중 오죽헌(烏竹軒)은 특이하게도 본가(本家)가 아닌 외가(外家)다. 사헌부(오늘날 검찰에 해당)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의 출생지다. 율곡의 본가는 경기도 파주지만 외가인 오죽헌이 더 알려져 있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7-]오죽헌

우리 조상들은 외가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맏이인 경우에는 거의가 그렇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결혼제도에서 기인한다. 조선은 남존여비사상이 강했고, 그 때문에 여자들이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한쪽 면만 본 것이다. 한국에는 옛날부터 여자들이 강했다. 조선시대 때는 관혼상제의 의식을 중국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지만, 결혼식만은 끝까지 우리의 방식을 고집했다. 중국의 혼인식은 신랑의 집에서 이뤄진다. 신부는 혼인식을 하고 그때부터 바로 신랑의 집에 머문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결혼식을 신부의 집에서 치렀다. 결혼식엔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장인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장가간다’거나 ‘장가든다’고 부르게된 까닭이다.



 

2 오죽헌 몽룡실에 있는 신사임당의 영정.



고구려 시대에는 장인의 집 뒤에 서옥(?屋)이라는 사위의 집을 지어 놓고 신랑을 거기에 살게하면서 10여 년 가까이 ‘혹사’시켰다. 신부는 신랑이 다치기라도 할까봐 아버지로부터 신랑을 보호하느라 전전긍긍했고, 그 전통은 아직도 한국인에게 전해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부인들이 유독 남편에 대한 보호의식이 강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때에 와서는 장인 집에 머무는 기간을 3년으로 줄였고, 조선시대 때는 대략 1년으로 줄였다. 그러던 것이 광복 후엔 3일로 줄어들었고, 지금은 하루로 줄었다.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와 신부의 친정집에 가서 하룻밤을 머문 뒤에야 신랑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과거에는 그 하루 동안 신랑이 동네의 청년들에게 ‘혹사’를 당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풍속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부부관계는 여성 중심이었다. 며느리가 힘든 시집살이를 한 것은 시어머니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시킨 것은 시어머니였지 시아버지가 아니었다.



 

3 오죽헌 내부의 모습



율곡은 셋째 아들이었지만 사임당이 오죽헌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은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에 위치하고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주위에 검은 색의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죽헌에 당도하니 웅장한 돌기둥으로 만든 정문이 관람객을 맞는다. 정문 안에 꾸며놓은 정원은 우리 문화에 걸맞지 않아 좀 실망스러웠다. 오죽헌 앞마당에는 향토민속관, 시립박물관, 선비문화체험관 등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다. 고즈넉하던 옛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오죽헌의 옛 건물에 들어서니 정면에 율곡의 영정을 모셔놓은 문성사(文成祠)가 보인다. 역시 시멘트로 만든 건물이란 점이 옥에 티처럼 마음에 걸린다. 가지런히 예를 올리고 오죽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옆의 옛 건물로 향했다. 오래된 건물이 가진 멋과 품격이 관람객을 맞이해 주고 있었다. 오른쪽 편에 몽룡실(夢龍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모부인 사임당은 33세 때인 12월 26일 새벽 현란한 태몽을 꾼다. 검은 용이 바다로부터 부인의 침실로 날아와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이다. 율곡의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한 것도, 몽룡실이란 현판을 단 것도 이 태몽 때문이리라.



 



사임당 머물러 있던 오죽헌서 태어나율곡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지만, 모친 외에 따로 스승이 없었다. 어머니 사임당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다. 13세 때 초시에 합격했으나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율곡은 3년간의 묘막생활을 마치고 금강산 마하연이라는 절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입산수도 끝에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친 율곡은 어느 날 숲속에서 만난 노승에게 시(詩) 한 수를 전해준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지만 위 아래가 같은 것(魚躍鳶飛上下同)이런 모습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這般非色亦非空).부질없이 한 번 웃고 이 몸을 바라보니(等閑一笑看身世)석양 빗긴 총림 속에 홀로 서 있네(獨立斜陽萬木中). 

4 오죽헌 주위에 많이 있는 검은 대나무인 오죽.



사람은 물고기가 물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을 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고기는 물고기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물에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솔개도 솔개가 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저절로라는 의미에서 차이가 없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다른 것으로 보지만, 모두 자연현상일 뿐이므로 다를 것이 없다. 색과 공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나무와 ‘나’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석양 빗긴 총림 속에 서 있는 이 몸 또한 빽빽이 들어서 있는 나무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를 알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를 깨달은 율곡은 더 이상 절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1555년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에 하산하여 세상으로 돌아왔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낙원과 속세도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타락하여 자연을 자연으로 놓아두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느라 세상을 점점 더 혼탁하게 만들어간다.



세상으로 돌아온 율곡은 이 세상을 이상세계로 만드는 일에 뛰어든다. 세상을 이상세계로 만드는 일을 유학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수양이 완성된 사람만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1558년 봄 도산(陶山)으로 가 퇴계 이황을 만나본 율곡은 퇴계에게 정치 참여를 권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퇴계의 수양철학에다 율곡의 정치적 실천력을 합치면 되는 것이었다.



 

5 오죽헌 입구에 있는 율곡 이이의 동상. 김경빈 기자



율곡은 퇴계를 만난 뒤 적극적으로 과거에 응시해 아홉 차례 장원급제를 했다. 1564년부터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이상세계 건설의 출발점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율곡은 1575년에 제왕학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여 선조에게 바쳤다. 『성학집요』는 임금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요체를 여러 경전에서 뽑아 정리한 것이다.



이 외에도 율곡은 다방면에 걸쳐 이상세계 건설을 위한 이론을 제시했고 그 실천을 위해 힘썼다. 율곡이 제시한 이론의 첫째는 입지(立志)였다. 뜻을 세우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개인적으로는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임금은 하(夏)·은(殷)·주(周) 3대와 같은 이상세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율곡은 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정치·경제·국방·교육에 걸쳐 혁신적인 이론들을 다양하게 내놓았다. 문벌과 신분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우수한 인재는 누구나 관직에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얼이나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 주장들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상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게 율곡 사상의 출발점이다. 실제로 율곡은 정실 소생이 없이 서자(庶子)만 있었지만, 양자를 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실천의 모범을 보였다.



율곡의 꿈이 영글기도 전에 검은 구름이 드리워졌다. 일본의 침략을 감지한 그는 10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지만, 무너지는 조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을 유성룡에게 천거하고는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유성룡에게 이순신 천거하고는…율곡 사후 8년째 되던 해인 임진년, 비극은 기어이 찾아오고 말았다. 일본의 침략에 조선은 초토화됐다. 포로로 잡혀가서 일본 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던 강항이 귀국하여 쓴 『간양록(看羊錄)』에는 그가 귀국하기 직전에 양심적인 일본의 승려가 찾아와 당부한 말이 적혀 있다. “일본은 반드시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니 조선은 침략당하지 않도록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정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투구의 싸움만 계속하다가 왜구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5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일본의 한 양심적인 지식인이 경종을 울리는 글을 썼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말라』라는 책에서, 일본은 또 다시 한국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라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파 간 싸움만 몰두하고 있는 정치권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접하니 마음이 다시 착잡해진다.



 



이기동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