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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점사, 은유 통해 세상사 재현한 것

중앙선데이 2016.10.02 00:32 499호 26면 지면보기

1998년 제3회 삼성화재배에 참가한 후지사와 슈코(왼쪽)와 조훈현이 유성의 삼성화재 연수원 잔디밭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후지사와는 대회 본선에 와일드카드로 참가했다. 두 기사 모두 감각적인 재능이 뛰어나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사진 한국기원]



퇴계 이황은 과거에서 장원했다. 모든 과목이 최고 점수였다. 하지만 주역은 D였다. 필자는 감탄했다. 모든 것을 잘했지만 주역은 그리 못했으니 뛰어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조선시대의 이해로는 주역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는 주역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직했다.


[문용직의 바둑과 주역 -하-] 易經의 언어

한학자 청명 임창순 선생은 바둑을 즐겼다. 필자에게 9점으로 속기였다. “바둑은 좋은 거라. 좋은 것일수록 가볍게 즐겨야 하는 기라.” 카랑카랑한 말씀이 참 편했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주역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과연 천재는 솔직할 자격과 힘이 있다. 선생의 지곡서당엘 놀러만 간 것이 후회스럽다. 주역도 일찍 했어야 했다. 1988년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을 때 선생이 써주신 ‘通幽入玄(통유입현)’만이 남았다.



주역의 나머지 반(半)을 들여다보자. 주역은 점을 쳐서 얻은 예측을 연말에 현실과 대조해 결과를 기록한 후 일반화한 것. 기록은 한자로 했다. 그러니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방식. 옛사람들은 이랬다. “옛날 유명한 학자 아무개가 이리 해석했다. 그것이 맞는 거 같다.” 그런 식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주석을 달았다. 겸손이지만, 옛사람에 기대어 권위를 찾는 데 열중했다. 주역의 언어 전체를 통괄해서 보려는 태도는 없었다.그런 식으로 얼마나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학자들 사이에서도 전거(典據)하는 바가 다르면 다툼이 일어난다. 기준이 없기 때문에 다툼은 일상적이다. 그것이 연구를 넓혀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숫자의 홀짝을 음양으로 바꾼 게 괘상다툼이 나왔으니 점 이야기에서 못한 문제 하나 풀자. 주역에 철학이 다양하고 넘치는데, 왜 그럴까. 까닭이 있다. 다들 괘변(卦變·괘상을 이리저리 연결해서 글자 뜻을 찾는 것)을 중심으로 철학을 찾아내고 있어서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주역 점은 본래 숫자괘를 만들기 위해 숫자를 찾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숫자는 뜻이 없다. 그러니 숫자의 홀짝을 음양으로 바꾼 괘상 또한 의미가 없다. 괘상은 단지 점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시사(指示詞)일 뿐이다.



이학근(李學勤)이 쓴 『周易經傳溯源(주역경전소원)』이 있다. 국립도서관의 분류는 ‘141.2-1-11’이다. 그 숫자가 책의 위치를 알려준다. 그와 같다. 지난 글에서 보았던 정괘(鼎卦)의 괘상은 도서관 분류 번호의 모음집과 같다. 괘상의 두 번째 자리는 점사인 “鼎有實 我仇有疾 不我能卽 吉”의 분류번호와 다름없고, 점사는 책에 해당된다.



그런 것을 외면하고 성인의 막대기설에 의거해 지시사에 의미가 있다고 보니, 의미 없는 숫자에 의미를 자의적으로 입히는 일과 같다. 그러면 어찌 되나? 논리학에서 보면 이렇다. 무엇을 말하든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자의적인 전제 때문이다. 공부할수록 미로다. 주역에 수많은 철학이 난무하는 까닭이 이에 있고, 주먹 센 놈이 주장하면 다들 고개를 숙여야 했다. 송나라 주희가 폼 잡은 이유다.



반상의 향기에 등장한 죠와(丈和) 명인. 통찰력 뛰어난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빨리 두어야 한다. 시간을 끌면 삿된 생각이 날 뿐이다.” 놀라운 안목인데 이유인즉 이렇다.



바둑은 신체 감각으로 두는 것. 몸을 대입해서 수법의 의미를 확인한다. 하지만 생각은 몸을 부정하는 결과를 빚는 게 보통이다. 실제 승부에서는 조심스레 두어야 하지만, 평소 공부할 때엔 감각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 방법은 빨리 두는 데 있다.



전문기사에 김원 8단이 있다. 이분의 IQ가 186이다. 함께 게임을 해보면 논리력에 압도당하는데,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너무나 논리력이 강해서 승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닌가 싶다. 후지사와 슈코가 67세에, 조훈현이 50세에 우승했던 것은 그들의 뛰어난 감각적 재능 때문이다.



상대의 머리에 돌을 얹어서 앞을 가로 막는다. 그것이 모자(帽子). 이런 은유적 표현으로 몸과 반상을 소통시키기에 바둑의 언어는 적극적이고 동적이다. 3월의 알파고 글에서 두터움(厚)이라는 어려운 수법도 감성의 발명품임을 얘기했었다.



주역은 바둑과 마찬가지로 은유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은유란 무엇인가. 은유란 구체적인 용어로 추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 “인생은 여행이다.” 이해된다. 그러나 “여행은 인생이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인생은 ‘추상적인 것’이기에 ‘구체적인 것’에 의해서만 개념화된다.



 



형상으로 구성하고 이미지로 바라봐점치는 관리(貞人)가 점을 쳤다. 얻은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표현해야 했을까. 의문은 세상사다. 그러니 얻은 답도 세상사요, 표현 방식도 세상사를 다루는 방식과 같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형상으로 구성하고 이미지로 바라본다. 눈앞에 무엇이 있는가. 나무·새·비·눈·산 그런 것이 있다. 두려운 것은 어둠, 칙칙한 땅 밑의 검고 차가운 물, 썩는 것, 그런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답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주역의 점사는 형상과 이미지로 이뤄진 세상사의 재현(再現)이 목적이다.



주역의 점사 즉, 역경의 언어는 은유를 통해 세상사를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주역의 일부인 역전은 목적이 다르다. 역경의 해석에 대해 철학적 지지를 보태주고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역전 특히 계사전의 언어는 설명의 언어로 덮여 있다.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음양이 번갈아 갈마드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것을 재현의 언어로 읽을 수 있는가.



재현을 위한 언어학적인 방법이 은유다. 예전에 순대국을 먹고 맛있어서 점을 쳤다. 대체 어떤 집이기에 이리 맛있지? 답은 둔괘(遯卦)의 여섯 번째 효사였다. 肥遯 無不利(살찐 돼지다. 불리하지 않다). 둔(遯)은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후대에 뜻을 새기는데, 원래 뜻은 구체적인 것으로 새끼돼지다. 크게 웃었다.



점사는 재현과 판단, 두 부분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비둔(肥遯)은 재현이요, 무불리(無不利)는 판단이다. 대개는 재현만으로도 뜻이 명확하지만 주역엔 판단을 하나 더 넣은 문장이 많다.



은유는 시(詩)의 본질을 이룬다. 대상을 처음 만났을 때 나오는 감정의 툭 터짐, 바로 그런 것이다. 이제 주역을 읽어보시라. 전혀 애매하지 않을 것이다. 딱 하나. 모든 점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전제를 신주단지 모시듯 모시지만 않는다면.



문장이 점사임을 인정해도 의문은 없지 않다. 하나의 괘를 보면 점사들이 공통된 단어를 많이 갖고 있다. 7개의 점사가 서로 연결되었기에 그런 거 아닌가?



역경의 작자 즉, 점치는 관리들도 자신들이 만든 세상에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우리가 자신만의 내면적 경계로 자기 책상을 정돈하듯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점사를 통일시키고자 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어떤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었고, 어떤 단어는 추상적인 것으로 일관되지 못했다.



 



점과 언어가 주역의 뼈대이자 전부노력의 결과는 이랬다. 단어가 구체적인 것일수록 점사는 서로 같은 단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추상적인 것일수록 공유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솥 정(鼎)은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의 몸과 같다. 발은 우리의 다리요, 그릇은 우리의 몸통이다. 손잡이는 귀요, 뚜껑은 머리다. 그러니 정(鼎)자는 다양한 세상을 골고루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 우물 정(井)도 그렇다. 밑바닥에서 뚜껑까지 우물은 몸의 아래 위를 은유로 이끈다. 건괘의 용(龍)도 그렇다. 신화적인 동물이지만 물속에서 살기도 하늘을 날기도 하는 용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 당연히 모든 점사에 골고루 들어갈 힘이 있다.



주역의 두 번째 괘는 곤괘(坤卦). 마왕퇴 백서 역경에서 곤(坤)은 천(川)으로 새겨진다. 천(?)이니, 순(順)과 뜻이 다르지 않다. 곤괘 괘사와 첫 번째 효사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바다. 흐르는 것은 변화하기에 구체적이지 않다. 붙잡을 수 없으니 모호하다. 그러니 곤괘의 점사 8개에는 중복되는 핵심 단어가 없다.



요약하면 괘의 이름이 ‘구체적인 것’일수록 여러 점사는 괘 안에서 동일한 단어를 공유한다. 반대로 ‘추상적인 것’일수록 점사는 같은 단어를 공유하지 못한다. 아래 그래프는 그 관계를 표시한 것이다.



주역의 작자들은 효사에서 큰 통일성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괘사는 달랐다(아래 표 참조). 그래서 괘사 앞에 괘사의 내용과는 별개로 괘명(卦名) 하나를 의례적으로 덧붙이는 방식을 찾았다. 주역의 구조는 그런 식으로 다듬어졌다.



역은 그런 것. 8상과 8괘, 태극 등 다른 문제도 없지 않지만, 그런 것은 사소하고 또 먼 후대의 작위적인 이해다. 점과 언어, 이것이 주역의 뼈대이자 전부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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