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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서 벼 재배한 ‘비에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중앙선데이 2016.09.25 00:40 498호 23면 지면보기

저장 위야오에 있는 하모도 문화 유적 박물관에 있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 상상 조형.



중국은 왜 중국(中國)으로 표기할까. 언제부터 그런 이름이었을까. 아주 이른 문명의 새벽녘에 벌써 그랬을까. 아니면 한참 뒤에야 그 이름을 얻어 지금의 정체성을 이뤘을까. 중국을 생각하면서 한 번쯤은 품어야 옳은 물음들이다.


[대륙의 風雨… 중국 인문을 읽다 -18-] 문명의 새벽 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을 문명으로 간주할 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녘의 모습은 매우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와 민족이 어렴풋이 제 모습을 갖춰가는 때는 일반적으로 신석기(新石器) 중반 또는 후반이다. 이 시기의 중국 모습은 어땠을까.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황하(黃河) 유역에 그림자를 드러냈던 사람들이 중원(中原)의 문화를 형성해 지금의 중국으로 줄곧 발전해왔다고는 믿기 힘들다. 옛날 옛적부터 전해지던 그런 ‘정설(定說)’은 한동안 중국인들의 머리를 지배했고, 그에 힘입어 중국 아닌 다른 지역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저 정설에 불과하다. 옳은 의미의 정설(正說)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언젠가 한번 자리를 잡았던 정설(定說)이 정설(正說)로 이어지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강변(强辯)하는 중국 문명의 ‘황하 기원설’은 이미 흔들린 지 퍽 오래됐다.



신석기 무렵의 진짜 중국 문명의 요소(要素)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보면서 중국인들은 당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럴 때면 중국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던 황하와 중원이라는 틀, 또 그 안에 갇힌 채 생각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중국 도작 문명의 흔적인 탄화 볍씨(중간, 오른쪽). 전민규 기자



신석기 북부 중국인 주식은 수수·기장·조1970년대에 큰 화제를 모았던 고고학적 발굴은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했던 중국 저장(浙江)에서 처음 몸집을 드러냈다.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신석기 무렵의 유적과 유물 등이 땅위로 나오면서다. 그곳의 지명은 지금 위야오(餘姚)다. 고려 때 개성과 활발한 교류가 있던 닝보(寧波)시 인근이다.



저장의 남부에 속한 이곳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쏟아져 나온 유물 등이 중국 문명의 형성과 깊이 연관을 지어 생각해 봐야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곳에서는 무엇이 땅위로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는 이곳 문명을 중국인들은 ‘하모도(河姆渡) 문화’라고 적는다. 이 명칭을 자세히 풀 이유는 없다. 원래 다른 이름이었다가 소리만을 취해 한자(漢字)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곳이 중국 남부에 있던 도작(稻作·쌀농사) 문명의 요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쌀을 즐겨 먹는다. 요리에 따르는 밥, 한반도 사람들의 식생활도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즐긴다. 한반도에 비해 그 정도는 더 강하다. 신석기 무렵인 5000년 전 중국인들은 어땠을까.



중국 남부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쌀을 먹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신석기 무렵의 중국 북부 상황은 매우 달랐다. 당시 북부의 중국인 주식은 쌀이라고 하기보다는 수수와 기장, 조 등이었다고 본다. 중국 북부와 남부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이 서로 달랐다는 얘기다.



 

7000년 전 중국 도작(稻作·벼 재배) 문명의 자취를 알렸던 ‘하모도 문화’의 유물. 발굴한 인골(아래)을 토대로 당시 사람들 생김새를 복원한 모습(위).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하모도’다. 7000년 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아 벼를 키웠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야생의 벼가 아니라 재배한 벼다. 하모도 유적의 저층(底層) 흙에서 그런 흔적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농사의 결과물인 재배 벼가 대량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 점은 뚜렷한 증거에 해당한다.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방문했던 저장의 항저우(杭州)도 도작 문명의 권역에 속한다. 아울러 중국 장강(長江) 인근에서는 이처럼 벼를 재배했던 도작 문명의 흔적이 도처에서 드러난다. 양저(良渚)라고 중국인들이 적는 문화 권역 또한 그에 속한다.



중국 남부에 일찌감치 등장했던 이들 문화 유적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황하 유역에 살았던 북부 중국인들과는 여러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삶을 영위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식(主食)이 달랐다는 점이다.



말은 당연히 더 달랐을 것이다. 생김새? 그 또한 같지는 않았을 테다. 피부색 또한 그럴 개연성은 아주 높다. 같은 황색 피부라고 할지라도 짙거나 엷은 농담(濃淡)의 차이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식과 생김새, 피부의 색깔 등이 달랐거나 달랐을지 모를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지금 중원에서 발흥한 사람들에게 쫓겨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것일까. 아니면 문명의 발전이라는 궤적을 따라 다른 지역의 달랐던 사람들과 피를 섞고 살을 합쳤던 것일까. 우리가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문명을 생각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이 하모도, 나아가 장강 주변의 양저라는 이름의 유적과 유물을 이룬 사람들의 정체성을 따질 때 비켜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사서(史書)를 비롯한 중국의 옛 문헌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월(越)’이라는 명칭의 사람 집단이다. 이들의 종류는 매우 많았던 듯하다.



 



베트남과 똑같진 않지만 연관성은 있어중국 남부 이곳저곳에 이들은 자주 등장한다. 궁벽한 산간에, 수량이 풍부한 하천에, 호박(湖泊)과 늪이 발달한 비옥한 평원에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빈도는 매우 높았다. 중국의 사서 등은 이들을 그냥 ‘월’로 적거나, 월인(越人) 등으로 기록했다. 그들의 갈래는 매우 많고 복잡해 어느 경우에는 백월(百越)로도 불렀다.



‘백월’은 월의 종류가 하도 많아 일일이 다 적을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이들 월을 가리키는 학문적인 명칭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류학적인 용어로 이들 월을 지칭하는 말은 비에트(Viet)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지금까지 국가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베트남이 그렇다. 베트남의 로마자 표기는 Vietnam이다. 중국의 옛 문헌에 자주 등장했던 월, 인류학적인 용어인 비에트가 다 그 안에 들어 있다. 베트남을 우리는 한 때 월남(越南)으로 적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중국 남부는 원래 베트남?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러나 과장이다. 단어 하나 우연히 겹친다고 지금 베트남을 중국 남부의 비에트, 월, 월인 등과 동일시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추정컨대 베트남과 중국 남부에 살았던 비에트는 모종의 연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일시하는 일은 어리석다.



춘추전국 시대에 같은 이름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등의 고사성어에 등장하는 월나라와 그에 속해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생동적이면서 극적이기도 한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이들은 춘추시대에 일찌감치 등장해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성한 국가체제를 이뤘던 집단이다. 오월(吳越)은 북부에서 중심을 형성한 중원의 제족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중원이 스스로를 문명으로 부르고, 그 나머지를 오랑캐로 여기던 시절에 이들은 후자인 ‘오랑캐’ 취급을 받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북부 중원의 조그만 지역에서 서서히 몸집을 키워가며 큰 판도를 이뤄가던 ‘중국’에 이들은 서서히 섞여 들어갔다. 춘추시대 말, 또는 전국시대 무렵의 일이라고 보인다. 이 무렵의 오나라와 월, 그로부터 서쪽에 있던 초(楚)나라까지 남부의 문명 요소들은 본격적으로 ‘중국’이라는 판도로 섞이면서 그 구성원의 일부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럼에도 이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오월(吳越)이다. 장쑤(江蘇) 남부와 저장(浙江) 일대를 지칭한다. 동남부의 푸젠(福建) 지역 문화를 이뤘던 토대는 민월(?越)이다. 그곳의 토착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저장 남부와 푸젠 북부는 동구월(東?越), 장시(江西)와 후난(湖南) 일대의 집단은 양월(揚越)이다.



 



주식·언어 달라 ‘중국인’ 되는 과정 고단중국 대륙 남단의 광둥(廣東)은 북부 중원 지역과의 차별성이 매우 심했던 곳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과 그 문화 토대는 보통 남월(南越)로 적었으나 후에 지역적 차이를 가리키기 위해 음은 같으나 모습이 다른 ?(월)이라는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광동의 서쪽에 있는 광시(廣西)는 보통 서구월(西?越) 또는 낙월(駱越)로 적었다. 이들은 지금의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사람들과 친연성이 매우 높은 집단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는 큰 갈래만을 다룬 분류다. 이보다 사정은 더 복잡해 중국의 옛 사서 등 문헌은 이들을 백월(百越)로 표기했던 것이다.



하모도는 그런 백월의 연원이 어디였는지를 잘 말해주는 유적이다. 동이 트기 한참 전의 중국 문명 모습은 그렇게 복잡했다. 하모도는 그를 말해주는 일부다. 더 많은 이질적 문명 요소들은 중국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국 서남의 곡창인 쓰촨(四川)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무렵부터 ‘중국’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몇천 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런 과정이 평화로웠을까. 피가 다르고 주식이 다르며,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마저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이는 과정은 매우 고단했을 것이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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