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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왕정 축출한 시민 세력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 마련

중앙선데이 2016.06.05 00:46 482호 21면 지면보기

그림 1 카스티안 루익스, ‘바니타스 정물 속의 영국 찰스 1세와 프랑스 헨리에타 알레고리’, 1669년 이후.



책에 실린 그림은 영국 군주 찰스 1세와 프랑스 출신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초상화다. 찰스 1세는 1640년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내전에 빠져든 후 의회파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이다. 왕비 헨리에타는 남편이 죽자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왕과 왕비라는 자리에 올랐지만 영화로운 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곧 고통과 오욕의 시간, 그리고 끝내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세상사가 모두 헛되다는 메시지를 담는 바니타스 정물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비주얼 경제사-42-] 시민 혁명과 경제 발전

찰스 1세의 생애는 영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다. 그는 절대주의의 이상을 품은 권위 있는 국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즉위한 1620년대는 종교적 갈등이 격화되고 전쟁 위협이 고조되던 혼란의 시기였다. 찰스 1세가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하자 의회는 그들의 승인 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내용의 ‘권리청원’으로 맞섰다. 이후 국왕과 의회는 11년 동안 소통 단절의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국왕이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열자 양측의 갈등이 폭발했다.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는 내전에 돌입했는데, 여기서 의회파가 승리함으로써 찰스 1세는 대역죄라는 죄명을 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다.



의회파의 승리는 단순히 권력 구조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왕당파가 상징하던 절대주의적 질서, 즉 신이 부여한 신성한 권력에 기초해 국왕이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사상의 몰락을 의미했다. 왕권을 뒷받침하던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왕실이 특정 집단에게 독점적 거래권을 부여하고 반대 급부를 수취하는 중상주의 체제가 무너짐을 의미했다. 신분제와 규제 중심의 경제구조가 시민 계급과 시장 중심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시민 혁명은 이처럼 정치·경제적 권력이 국왕에서 시민 계급에게로 넘어오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나폴레옹 법전 선포로 시민의 권리 확립한편 내전의 종식으로 공화국이 될 것 같았던 영국은 흥미롭게도 다시 왕국으로 돌아갔다. 1660년 해외망명 중이던 찰스 2세가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뒤를 이은 제임스 2세가 독단적 정책을 펴자,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과 메리 부처를 영국 왕으로 추대하는 무혈의 명예혁명이 발생했고 이어서 ‘권리장전’을 통해 왕권의 한계가 명문화됐다. 영국인이 선택한 장기 균형은 입헌군주정이었던 것이다. 새 균형점에서 부르주아지는 국왕 및 지주층(귀족)과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게 됐다. 이처럼 영국의 시민 혁명은 미온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시민 혁명이 가져온 효과는 분명했다. 법에 의한 통치라는 원칙이 뿌리를 내리고 개인의 재산권이 철저히 보호받게 되었다는 점이야말로 시민 혁명이 창출해낸 ‘혁명적’ 변화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시민 혁명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됐을까. 해협 건너 프랑스에서는 영국에서보다 훨씬 극적인 형태로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재정난에 처한 국왕 루이 16세가 중세 제도인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나선 행동이 발단이 됐다. 구체제 하에서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대부분의 직접세를 면제받는 등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삼부회가 소집될 무렵 이들 신분은 약 50만 명으로 전 국민의 2% 남짓했다. 나머지 98%가 제3신분이었는데, 그중 부르주아지가 약 100만 명이었다. 부르주아지의 일부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점차 귀족과 동질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은 부르주아지와 계속 차별화되기를 원했다. 중세 기준 그대로 삼부회를 구성하려 하자 이에 부르주아지가 반발하면서 혁명이 시작됐다.



 

그림 2 작가 미상, ‘제3신분의 각성’,1789년.



그림 2는 혁명 당시에 발간된 인쇄물이다. 부르주아지가 귀족과 성직자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무장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른 두 신분이 화들짝 놀라고 있다.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의 공격 장면이 그려져 있다. 혁명 과정에서 정국은 수차례 요동쳤고, 소부르주아와 소농민 계층이 시민군에 합류하면서 싸움은 시민 세력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마침내 1793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혈혁명을 통해 프랑스는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었다. 1789년 봉건제도가 폐지되어 영주의 특권과 농노의 예속성과 같은 신분제가 사라졌다. 같은 해 선포된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신분과 상관없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천명했다. 이어서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정한 민법전(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은 사적 소유권의 확립과 계약 자유의 원칙과 같은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핵심원칙을 정립했다. 이런 시민 혁명 과정을 거쳐 구체제의 절대 왕정, 신분제, 중상주의는 결국 새로운 공화제, 시민적 자유, 경제 활동의 개방으로 대체됐다.



 



남북전쟁은 신분제 철폐 위한 시민 혁명미국의 경우엔 시민 혁명의 과정이 독특했다. 영국의 식민지 13개 주에서 시작한 미국에게는 극복해야 할 군주제와 중상주의 권력이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시민 혁명은 곧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쟁취를 의미했다. 영국이 식민지 지배와 국제적 전쟁 수행에 드는 비용을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부과하려는 시도가 저항을 촉발시켰다. 미국은 식민지 주들이 결속하고 영국과 경쟁관계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힘겨운 독립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종속적인 식민지 경제구조를 극복하고 독자적 발전을 도모할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1776년 발표된 ‘독립선언문’은 시민적 권리를 확인하는 역사적 문서가 됐다.



 

그림 3 흑인의 신병 등록을 촉구하는 북군 포스터, 1864년경.



그러나 미국의 특수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유럽과는 달리 신분제를 쉽게 철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권은 아직 백인에게만 적용될 뿐,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에 얽매어 있었다. 미국 남부의 경제는 노예를 대규모로 고용하는 플랜테이션이 중심이었다. 상공업이 성장하고 있는 북부에서는 노예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남부 지주들로서는 노예 없는 경제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런 이해관계 탓에 노예제의 철폐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이 미완의 과업은 남북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을 통해서야 완수됐다. 1863년 링컨대통령이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하고, 흑인에게 연방군(북군)에 참가할 것을 독려했다. 그림 3은 이듬해에 흑인의 신병 등록을 촉구할 목적으로 제작된 포스터다. 노예해방 선언에는 남군의 전열을 흔들려는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지만, 거시적으로 보자면 신분제의 폐지를 통해 시민 혁명을 마무리한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사회주의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역사적 실체가 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본주의 역시 혁명을 통해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영국·프랑스·미국은 나름의 방식으로 시민 혁명을 경험했다. 발생 시기와 배경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이뤘다. 이제 개인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부당하게 침해받을 염려 없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권력을 쥔 부르주아지는 법치주의로 무장하고서 경제 제도와 정책을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갔다. 시민 혁명은 이로써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가속화될 기반을 탄탄하게 마련해줬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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