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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걸려 시집 내면 100만원 문학관엔 수십억원 쓰면서 시들어가는 문인 나몰라라

중앙선데이 2016.06.05 01:12 482호 8면 지면보기

최영미 시인은1961년생.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으로 데뷔했다. 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강력한 존재감을 알렸다.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2005), 『도착하지 않은 삶』(2009), 산문집 『시대의 우울』(1997),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2000), 『화가의 우연한 시선』(2002) 등이 있다. 생경한 언어와 성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최영미 시인은

1961년생.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으로 데뷔했다. 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강력한 존재감을 알렸다.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2005), 『도착하지 않은 삶』(2009), 산문집 『시대의 우울』(1997),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2000), 『화가의 우연한 시선』(2002) 등이 있다. 생경한 언어와 성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인

 



 



1990년대 중반이다. 한 젊은 여성 시인의 성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에 독자들은 혼비백산한다. 시집이 나오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시인의 어머니는 성당의 신부·수녀에게 자랑스레 책을 돌렸다. 그날 밤 ‘퍼스날 컴퓨터’란 시를 읽은 어머니는 경악했다.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이란 구절 때문이다. 어머니는 신부님에게 전화해 ○○페이지는 읽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딸에게 말했다. “동네 창피하니까 밤에만 다니라”고. 그러나 시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시인은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최영미(55·사진)다. 그가 최근에 페이스북을 통해 가난한 시인의 궁핍한 삶을 털어놓았다. 시로는 생계유지가 안 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뜻밖이다. 시인이 시로 얘기하지 않고 페이스북으로 속내를 털어놓다니…. “최근에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하는데 묘한 중독성이 있더라. 올릴 거리가 마땅한 게 없었는데 세무서에서 저소득자에게 지급하는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올렸는데 이렇게까지 와글와글하게 될 줄 몰랐다. 덕분에 그동안 수차례 독촉해도 받지 못했던 밀린 인세까지 받고.”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당시 무려 52쇄까지 찍으며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키지 않았나. 대부분 사람들은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란 시 구절에서 한 번쯤 경기가 들린다. 베스트셀러 시집 덕분에 많은 사람은 부자 시인으로 알고 있다.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 시집으로 1억원이 조금 넘는 인세를 받았다. 그래서 전세를 살게 됐다. 그것으로 끝이다. 전세는 작은 전세로, 시간이 흐르면서 월세로 옮겨갔다. 그동안도 놀지 않았다. 시도 쓰고 강연도 하고 번역도 하고…. 그러나 그것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 결국 이렇게 세무서에서 연락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들여 쓴 시 한 편을 잡지사에 보내면 보통 5만원 받는 게 한국이다.”



-시집 인세가 얼마인가. “인세가 10%다. 요즈음 시가 안 팔리니까 1만원짜리 시집을 1000권 찍으면 100만원이다. 시집 한 권 내려면 2~3년 시를 써야 시가 모인다. 2~3년 써서 100만원 버는 현실에 한국 문단이 유지되는 게 기적이다. 데뷔 이후 그동안 시집 5권에 장편소설 2권, 산문집 5권, 번역본 2권 등등 정말 나름대로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책을 펴낼수록 가난해져 왔다. 첫 장편소설인 『흉터와 무늬』를 쓰는 5년 동안 사보 에세이 등 다른 글을 일절 쓰지 않아 수입이 줄었다. 그래서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대출도 어려웠던 쓰라린 기억도 있다.”



시 쓰고 강연하고 번역도 했지만저소득층 장려금 신청하는 지경에



아버지는 1965년 5·16 반혁명사건에서?JP 체포 책임자집안 풍비박산 나고 가난하게 성장



극단적 양극화, 한국 문학 고사시켜시가 죽으면 건강한 사회 될 수 없어



-인터뷰하는 나까지 우울하다. 그러나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는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이란 시도 있다. ‘배부른 시인의 시와 배 나온 목사의 설교를 믿지 말라’는 서양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 얘기 많이들 하더라. 맞는 말이다. 이 시에는 가난의 찌듦보다는 궁핍함을 초월하는 긍정과 따뜻함이 있다. 위대한 시인들은 대개 가난했다. 그러나 시인도 인간이고 생활인이다. 최소한의 품위와 함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전업 작가는 더 힘들다. 내 경우 장편을 쓰는 동안엔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밥도 하지 않고 사먹는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으면 대중에게 잊혀지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시 외에 굴곡 많은 삶도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다. 자전소설 『청동정원』이 화제였다. “그런가? 많이 시달렸다. 그 책에는 나의 경험이 녹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그 시절 인텔리 부모 덕분에 풍족한 삶을 산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어렵고 힘들었다. 세검정에 오래 살았다. 한국전 참전 장교였던 아버지는 1965년 5·16 반혁명사건에서 반(反)쿠데타 음모에 가담하는 바람에 집이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가 JP(김종필 전 총리) 체포 책임자로 JP의 신당동 집을 맡았다. 누군가가 배반해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고 하더라. 시사잡지에 다 나와 있는 얘기다. 그 여파가 가난으로 왔다. 아버지 고향이 강원도 문막 섬강 인근이다. 좁은 방에서 돈 벌러 원주에서 상경한 할머니 고모와?6, 7명이 포개어 잤다. 바가지 들고 친척집에 쌀 꾸러 갈 때마다 쌀 흘릴까봐 사뿐사뿐 걸어오라는 어머니 말씀이 지금도 짠하다. 점심은 가끔 수제비로 때웠다. 평생 일정한 직장 없이 떠돌던 아버지가 잠시 괜찮은 직장을 얻은 덕분에 대학 시절 한동안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등교하던 때도 있었다. 그 풍경을 기억하는 대학 동창들은 지금도 나를 상당한 부자로 오해하고 있더라.”



-상당히 귀티 나는 미인이다. 재학 시절 서울대 미녀라는 소문에 많은 남학생이 설렜다고 하더라. “아마 키가 크고 늘씬해 그런 얘기를 들었다. 철이 없는 편이다. 나는 낭만주의자다. 소녀 시절 엄청나게 책을 읽었다. 그것도 낭만주의 소설을. 스탕달, 로맹 롤랑, 바이런 등등을 끼고 살았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여/ 술을 마시고 취해 보라/ 인생의 묘미는 모르는 사이에 취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바이런의 시 구절인데 지금도 외운다. 크면서 세상에 눈뜨게 됐다. 80년대 서울대 캠퍼스는 운동권 소굴이었다. 그냥 지켜보고 있기가 어려운 험악했던 시대, 그래서 어찌어찌 해서 운동권이 되었다. 신동엽·김수영·황인숙·최승자의 시가 좋다. 특히 최승자 시인을 시의 순교자로 생각하며 좋아한다.”



-왜 시가 읽히지 않고 있을까. “시로 말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 게임·드라마·영화가 넘치는 시대다. 활자문화의 쇠퇴는 시의 쇠퇴로 이어졌다. 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더욱 치명적이다. 소설과 달리 사람들은 좋아하는 시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공유한다. 유명한 시는 이미 페이스북에, 블로그에 다 나와 있다. 시집을 살 이유가 없어진 거다. 현재의 시스템도 문제다. 한국에서 문인으로 살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문학성을 인정받아 평론가의 눈에 들어 문학상을 받거나 아니면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소설은 드라마도, 영화도 된다. 그러나 시는 다르다.”



-하루 종일 글만 쓰고 계시나. “야구와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이 있다고, 스포츠 해설가로 손색없겠다고 후배들이 말하더라. 두산 팬이다. 2009년 여름 두산과 롯데 경기에 시구까지 해봤다. 단 한 번의 시구를 위해 한 달 동안 스트라이크 던지는 연습을 했다. 김현수 팬이다. 야구·축구에 미치지 않고 더 많은 책을 썼더라면 지금쯤 자그마한 집 한 채라도 있었을 텐데…. 최근 들어 정부와 공공기관·지자체들이 저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문학관을 짓는다. 어느 시인의 경우 고향에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문학관과 창작교실을 지어줬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한국 문학을 고사시키고 있다. 작고한 시인을 추모하는 기념관은 거금을 들여 지으면서 주변에 가난에 시들어 가는 문인에 대한 지원은 나 몰라라 한다. 지자체가 움직여야 한다. 가난한 작가들에게 월세를 지원하는 방식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시가 죽어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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