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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음악의 민첩한 세공사

중앙선데이 2016.06.05 00:28 482호 27면 지면보기

니키타 마갈로프의 쇼팽 피아노 음악 음반.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곁에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혼자 이렇게 멋진 음악을 들어도 되나?’ 가끔 이렇게 자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족을 불러 듣던 곡을 다시 되풀이해 함께 들었다. 불과 몇 분에 그치는 음악이라 같이 듣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대단한 명곡을 생각하겠지만 주위에서 흔히 듣는 쇼팽의 마주르카 op.7-1이다. 전에도 이 곡은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날만큼 꿀통에 얼굴을 묻은 듯 향취에 짙게 젖어본 적은 없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니키타 마갈로프(1912~1992)라는 별난 연주자 덕분이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피아니스트 니키타 마갈로프

마주르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쇼팽의 주요작품 리스트에는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폴란드 민속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폴로네이즈가 버티고 있다. 규모가 크고 더욱 화려하며 스토리도 풍부한 덕분이다. 그러나 내용을 따져보면 마주르카는 쇼팽의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 특히 작곡가의 내면과 관련해, 독자성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내가 ‘건반의 세공사’로 명명한 니키타 마갈로프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석 세공사는 손길이 민첩하고 섬세한 솜씨를 지녀야 한다. 그의 손은 민첩하기 이를 데 없는데, 건반 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터치도 닿을 듯 말 듯 가볍게 한다. 이런 경향 때문에 마갈로프는 쇼팽의 깊이와 감상성을 살리지 못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던 것 같다. 그는 도리어 쇼팽 곡에서 감상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건조한 연주를 하는데, 마주르카 같은 춤곡에선 좋은 효과를 낸다.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화사한 의상의 무희들이 활기차고 아기자기한 몸짓으로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오래 전 폴란드 민속 노래를 담은 음반 마조브세 (Mazowsze) 한 장을 우연히 구해 매혹된 경험이 있다. 그때는 구하기 힘든 귀중품이었으나 지금은 같은 계열 음반을 몇 장 가지고 있다. 남녀 혼성 합창인 그 노래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노래였다. 춤은 4분의 3박자로 진행되는 단순한 동작이지만 매우 활기차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주르카는 폴란드 동북부 지명과 관련이 있으나 러시아 발레단에 등장하는 마주르카는 동작이나 의상 등이 마조브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실로 미루어 마조브세가 농민의 소박하고 야생적인 춤과 노래를 고스란히 되살린 것에 비해 쇼팽은 같은 소재에 높은 예술성을 부여해 누구나 즐겨 듣는 음악으로 만들어 냈다. 그가 15세 소년시기 첫 곡(op.6)을 만들고 op.68까지 평생 작업한 걸 보면 쇼팽이 여기에 기울인 열정과 애착을 알 수 있다. 애국심이 유별났던 쇼팽에게 고국 민중의 생생한 숨결을 순도 높은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니키타 마갈로프는 쇼팽 음악의 절대적 지지자다. 그가 쇼팽 음악, 특히 마주르카에서 탁월한 미적 효과를 거두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세공사의 모차르트, 슈베르트 연주는 어떨까?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는 아기자기한 맛은 있으나 형태의 경계가 흐릿하고 특유의 화려한 맛이 사라져 버린다. 음표가 서로 엉켜 곡이 작아지는 느낌도 준다. 손이 건반을 너무 빨리 떠나 공명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이것도 취향에 따라 달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 소나타 D.959는 정교하고 섬세한 대신 슈베르트의 호흡과 여백, 감정 기복이 크고 선이 뚜렷한 노래는 흔적이 없다. 알프레드 브렌델 연주에서 느끼는 이 모든 것이 없거나 미약해서 아쉬움을 준다.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듣다가 쇼팽으로 돌아오자 그는 아연 활기를 띤다. 화려한 왈츠 op.34-1은 규모도 있고 진폭이 큰 곡인데 절창을 들려준다. 그는 생의 경로가 쇼팽과 유사한 때문인지 역시나 쇼팽 음악에 특화된 연주가로 보인다.



마갈로프는 그루지아의 귀족 가문 태생으로 페테르부르그에서 출생했으나 6세에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를 경유, 파리에 정착했다.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러시아를 떠난 것이다. 파리 음악원 동료였던 라벨은 “마갈로프 내면에서 굉장한 음악가가 꿈틀대고 있다”는 말로 그를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이올린 명주자 요제프 시게티의 사위로 장인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는 친구이자 쇼팽 연주의 전설이 된 디누 리파티의 뒤를 이어 제네바 음악원 피아노 파트를 맡았는데 이때의 제자들 가운데 마르타 아르헤리치, 잉그리드 헤블러 같은 쟁쟁한 연주자들이 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니키타 마갈로프의 쇼팽 연주를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글 송영 작가 mdwr31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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