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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 망친 히틀러의 런던 폭격 명령

중앙선데이 2016.04.03 00:50 473호 21면 지면보기

런던 세인트폴 성당 앞의 건물 옥상에서 한 영국 병사가 독일의 공습을 감시하고 있다.



“전쟁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없다.”


[2차대전사로 보는 기업 경영-4-]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

윈스턴 처칠의 이 말만큼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1940년 늦은 봄, 암울했던 영국에 승리의 희망을 불어 넣은 건 2000명이 안되는 젊은 조종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격전을 앞세운 독일군은 천하무적이었다. 덴마크·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프랑스를 깔아뭉갰다. 프랑스에 나가 있던 영국 원정군은 6월 초 탱크와 야포는 물론 소총까지 버리고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몸을 빼냈다. 처칠이 애타게 끌어들이고 싶어한 미국은 굳건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고립무원, 사면초가였다.



  

독일의 주력 전투기인 메사슈미트 Bf109. [분데스아치브]



Bf109 vs 스핏파이어, 도버 해협의 결투히틀러의 다음 목표가 영국이라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독일군은 ‘바다사자 작전’으로 이름붙인 영국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도버 해협을 넘어 일단 상륙에 성공하면 중화기와 병력이 부족한 영국 육군에겐 승산이 없을 터였다. 다행히 해군은 영국군이 훨씬 우세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해군력은 독일군의 열배에 가까웠다. 전통적으로 천연 방어벽 역할을 해온 영불해협도 상륙작전의 걸림돌이 될 터였다. 하지만 해군이 하늘까지 지배할 순 없는 법. 프랑스 전투는 스페인 내전에서부터의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독일 공군의 실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날렵한 모습의 메사슈미트 Bf109E전투기는 상공을 지배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내려꽂히는 슈투카 Ju87 급강하폭격기는 연합군 탱크와 포병에게 악몽이었다.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의 도시 로테르담을 단 하루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히틀러와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독일 공군이 영국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본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영국은 본토 항공전에 대비해 세가지 히든카드를 감추고 있었다. 레이더와 스핏파이어 전투기, 공군 전투기사령부 사령관 휴 다우딩 공군대장이다. 영국 항공전에서 레이더의 활약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다. 레이더의 원리는 모든 나라가 다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실험실 밖으로 꺼내와 실용화한 게 영국이었다. 촘촘히 설치된 철탑과 전선들로 이뤄진 레이더 망은 독일과 프랑스·네덜란드에서 날아오는 독일 항공기들의 경로와 숫자를 상당히 정확하게 탐지했다. 이 덕분에 영국은 시간과 연료를 허비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전투기를 내보낼 수 있었다.

영국의 주력 전투기인 스핏파이어 [게티이미지]



스핏파이어는 허리케인처럼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장착한 단발 전투기다. 동체를 천으로 감싼 허리케인과 달리 금속 외피를 채용하고 아름다운 유선형 동체를 가졌다. 당시로선 고공에서도 Bf109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였다. 허리케인보다 1년 늦은 1939년 배치된 최신예기였기에, 영국은 스핏파이어를 유럽에 내보내지 않고 본토 방위를 위해 아껴뒀다.



다우딩 대장은 레이더와 스핏파이어를 포함한 통합 지휘·통제·보급체계를 만들고 운영한 주역이다. 그는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 지휘소 사이를 콘크리트로 보호되는 전화선으로 연결했다. 그 덕에 독일군이 한두곳을 파괴해도 전체 방공 시스템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괴링의 물량전에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맞선 셈이다. 고집불통에 예의 없고 다른 장군들과 사이가 나빴던 그는 ‘꼰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금속제 단발 전투기의 가능성을 주목해 스핏파이어 개발을 지원하고, 착실하게 레이더를 실전에 배치하고 개량하는 데 앞장선 선각자이기도 했다.

독일의 폭격으로 무너진 런던 시가지의 건물들 사이에서 불을 끄고 있는 영국 소방관들. [New York Times Paris Bureau Collection]



 우연히 런던에 떨어진 폭탄이 전황 바꿔독일군도 영국에 시간을 벌어줬다. 히틀러는 영국을 상대로 하는 군사작전보다 휴전이나 항복 같은 정치적 해결을 원했다. 바다사자 작전을 8월 15일에서 한 달 뒤로 연기한 것도 망설임 때문이다. 이 때문에 3000대에 가까운 항공기를 집결시키면서도 6월과 7월 두달 간 영국 본토가 아닌 해안의 작은 마을과 오가는 상선을 공격하는 데 주력했다. 다우딩은 일부러 적은 수의 전투기를 내보내며 보유 항공기가 300~400대 밖에 없다고 독일군이 착각하게 만들었다. 실제론 700대에 가까운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이 있었다.



처칠의 전쟁 의지가 꺾이지 않자 히틀러는 마침내 전면 공격을 명령했다. 8월 5일로 예정됐던 작전은 날씨 탓에 12일 시작됐다. 영국 본토, 특히 런던을 포함한 잉글랜드 남서부가 독일군 쌍발폭격기로 뒤덮였다. 수십 대, 때론 100대 이상 무리를 지은 하인켈 He111, 도르니에 Do17 폭격기들이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 산업시설을 겨냥했다. 15일엔 1000대가 넘는 독일기들이 날아들면서 영국 항공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독일군의 물량 공세는 단기적으로 손해 보는 장사였다. 영국 전투기 한대가 추락할 때 독일 폭격기나 전투기 세 대가 떨어졌다. 더우기 영국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를 전투에 다시 투입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 조종사는 대개 복귀가 불가능했다. 이 결과 승무원 손실비가 영국 1대 독일 12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래도 유리한 건 전쟁에 오래 대비해 온 독일이 될 터였다. 영국으로선 전투기는 어찌어찌 공급한다 해도 조종사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보충되는 조종사가 전사나 부상당한 조종사의 3분의 1 밖에 안됐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야간 공습으로 생산 차질도 심각해졌다.



영국을 구원한 것은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됐다. 8월 25일 새벽,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가 우연히 런던 한복판 스퀘어마일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런던 폭격을 금지하고 있던 히틀러는 당황했고 처칠은 분개했다. 그는 25일 밤부터 29일까지 영국군 폭격기들을 베를린으로 보냈다. “베를린에 적기의 폭탄 한발 떨어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히틀러도 런던에 대한 보복 폭격을 지시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신창이가 돼가던 영국 공군의 숨통을 틔워준 결정이 됐다. 독일이 건드리지 않는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지휘소를 바탕으로 영국 공군이 더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5일 독일군 최후의 대공습이 실패로 끝나자 히틀러는 이틀 뒤 영국 상륙작전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관심을 돌린다.



10월 말까지 100여일간 이어진 영국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2400기 이상의 항공기를 전투나 사고로 상실했다. 보유 전투기와 폭격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물량이었다. 탑승한 조종사와 승무원 손실은 더 뼈아팠다. 독일 공군은 남은 대전 기간 내내 이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다. 영국의 방어태세를 간과한 채 물량 공세를 펴고, 히틀러의 변덕으로 전략적 일관성을 팽개친 대가였다.



히틀러가 런던 폭격 대신 비행장과 관제소에 대한 공습을 계속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흥미있는 주제다. 한계에 달했던 방공망이 무너질 경우 독일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영국이 항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경우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독소전의 전개도 원래 역사와는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영국이라는 교두보가 없다면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노르망디 상륙 같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가 난감했을 것이다. 독일이 전략 목표를 외면한 결과는 이처럼 엄청났다.



 



평판 TV 간과한 일본 전자업계와 비슷기업들에게도 전략 목표의 설정은 성패를 가르는 중요하는 부분이다. 1990년대까지 세계 영상기기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 전자업체들의 몰락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트리니트론 브랜드의 브라운관 TV로 독보적인 선두를 지키던 소니는 액정(LCD)과 플라즈마패널(PDP)이라는 신기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다. 2000년대 들어 삼성 등 후발주자들이 LCD TV에 집중할 때도 브라운관 TV에 매달리다가 시장을 내줬다. 당시만 해도 브라운관이 화질면에서 우수했지만 평판 TV가 디자인 면에서 우수하고 관련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파나소닉은 빠르게 성장하는 LCD 대신 PDP에 집중하다 결국 관련 사업을 접었다. LCD 기술을 선도했던 샤프는 일본 국내 생산만 고집하다 가격 경쟁에서 밀려 최근 대만의 폭스콘(훙하이 그룹)에 인수될 처지에 놓였다. 소니와 파나소닉은 전략 목표를 잘 못 잡았고 샤프는 목표는 제대로 짚었지만 정확한 목표를 타격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미래를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업 경영진에게 정확한 정보와 이를 해석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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