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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루해질 때쯤 필요한 유쾌한 패션

중앙선데이 2015.12.13 00:24 457호 29면 지면보기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제레미 스캇(41)은 패션계의 ‘악동’이다. 무대 위를 걷는 남자 모델의 카우보이 바지 뒷부분을 뻥 뚫어서 ‘알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식이다. 그의 이름은 여느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패피(패션 피플)’들뿐 아니라 한국의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아디다스와의 협업 덕분이다. 트레이닝복 한가득 무궁화를 박아 넣은 디자인을 기억하는지. 흰색 하이톱 운동화 양 옆에 퍼덕이는 날개를 붙여놓은 장본인도 그다. YG의 걸그룹 2NE1과는 절친 사이여서 수시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페이스 북을 장식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스캇의 디자인은 ‘유쾌함(FUN)’이 콘셉트다. 기성세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독설을 날리는 것은 예사다. 독일의 유아용품 브랜드 싸이벡스와 협업을 진행하면서 만화 속 인물 바트 심슨의 ‘Adult Suck then You Are One(어른들은 구려, 니가 최고야)’이라는 대사를 슬로건으로 내세울 정도다.


style talk: 이런 옷을 어떻게 입느냐고요?

그는 2013년부터 이탈리아의 유명 패션 브랜드 모스키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창업주인 프랑코 모스키노 역시 개성을 몰살하는 기존 패션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쇼윈도에 ‘STOP THE FASHION SYSTEM(패션 시스템을 멈춰)’이라는 글자를 써놓는가 하면, 샤넬?롤렉스 등 고가 브랜드의 로고와 대표상품을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재해석해 소비위주의 문화를 비웃는 등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2016 SS 컬렉션에서 공사현장·길거리 안전표지판을 이용한 ‘공사를 위한 옷(CLOTHED FOR CONSTRUCTION)’을 선보였을 때 깜짝 놀랐다. 도로 환경미화원들이 입는 오렌지색 비닐 유니폼과 레몬 빛 형광 사인으로 만든 원피스와 재킷이라니! 게다가 공사 장비인 더블 클램프를 이용해 샤넬의 더블C 로고를 연상시키는 그래픽도 만들었다. 이걸 지금 입으라는 거야? 그런데 1일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만난 모스키노 본사의 글로벌 홍보 담당자 알레산드라 사르니는 “브랜드의 철학인 ‘위트’가 그대로 살아있는 디자인”이라며 스캇과 그의 디자인을 자랑스러워 했다.



팔리기는 할까, 하는 걱정도 기우였다. 같은 날 선보인 ‘캡슐 컬렉션’은 청소용 세제 로고를 프린트한 티셔츠, 백팩 등이 주 상품이었는데 반응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24일 밀라노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매장에서 구입이 가능할 수 있게 했다. SPA 브랜드들의 카피를 방지하기 위해 제품을 미리 만들어두고 쇼가 끝남과 동시에 매장에서 팔기 시작하는 시스템이다. 판매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미리 만들어두는 이런 시스템은 적용할 수가 없다.



어쩌면 제레미 스캇은 악동이 아니라 명민한 마케팅 천재인지도 모르겠다. 모스키노에 가서 ‘파워 퍼프 걸’ ‘슈퍼 마리오’ 등 만화·게임 캐릭터를 이용해 그가 만들어낸 제품들은 첫눈에 보기엔 점잖지 못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은 ‘키덜트’ 세대의 맞춤 아이템이 아닌가.



보편성의 눈으로는 그저 황당하기 만한 FUN 제품이 누군가에게는 ‘일탈’의 즐거운 경험이 될 터다. 실제로 우리는 FUN 제품을 보며 한번 웃고나면 기분도 좋아진다. 설령 내가 그것을 사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세상에 누구 한 사람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즐거운 상상을 마음껏 펼쳐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세상이 덜 지루할 테니까. 디자이너의 즐거운 상상력을 독려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기업문화도 조금은 부럽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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