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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한반도 해역 기뢰 제거는 전투행위 … 비밀로 하라”

중앙선데이 2015.09.26 02:26 446호 8면 지면보기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1950년 2월 18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하네다 공군기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해주·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맥아더, 日 참전 부인… 요시다 “기억 없다”일본인의 사실상 참전은 6·25전쟁 당시에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박헌영 북한 외상은 50년 10월 15일 소련군에 붙잡힌 일본인 포로들을 근거로 “한국전쟁에 일본군 부대가 참전한 것은 국제연합법과 일본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은 “만약 일본군이 미군을 도운다는 이유로 한국 전선에 참전하면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군과 먼저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이터통신)로 활동한 지갑종(88) 유엔한국참전군협회장은 “이 대통령은 원산상륙작전 이후 중공군 개입(10월 25일) 이전 시점에 그런 발언을 했다”고 회고했다.이에 대해 맥아더 원수는 참전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미 육군이 발간한 전쟁사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전투 목적이 아닌 인도적 목적으로 일본 소해정을 사용했다”고 미 국방부에 보고했다.



51년 당시 30대 의원이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대정부 질문에서 “한국 파병은 일본의 (평화헌법) 기조를 흔드는 것 아닌가”라며 요시다 총리를 추궁했다. 요시다 총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이란 역사적 진실을 끝내 감출 수는 없었다. 로버트 머피 전 주일 미국대사(52∼53년 재임)는 후일 “(35년간의 식민통치 경험으로) 한국을 잘 아는 수천 명의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국에 가서 (6·25전쟁을) 돕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6·25전쟁 개입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 소해부대원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공무원 신분으로 참전했다”며 “일본 정부의 국가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한국에 양날의 칼일본은 6·25전쟁을 계기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일본이 얻은 전쟁 특수만 62억 달러(최근 환율로 7조4000억원) 규모였다. 무엇보다 일본은 6·25전쟁 중이던 51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립국이 됐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배상 책임과 독도 문제에서 유리한 입장에 섰다. 52년 3월 GHQ는 일본 정부의 무기 생산도 허가했다.



6·25전쟁 때 일본인들이 한국 정부나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역사적 기록은 한반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일본은 패전 직후에도 한반도를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소련과 협상했다”며 “식민지 향수가 있는 일본 우익들은 한반도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기정



양영조 전사부장은 “집단적 자위권 관련 안보법안 통과로 일본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이 6·25전쟁 때보다 훨씬 커졌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일본 해상자위대는 세계 2~3위, 항공자위대는 세계 4위로 평가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박영준 국방대 교수).



정옥임(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 고려대 초빙교수는 “집단적 자위권은 한국의 안보에 양날의 칼과 같다”며 “한·미 동맹을 보험으로 갖고 미국의 틀 속에서 일본을 바라보면서 북한의 도발에 분명한 대응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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