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재구성
여비서 일정표에 반기문 이름 두번
“베트남 주석 한국 초청 위해 돈 줘”
박씨 진술했지만 조서엔 안 남아
노무현 숨진 뒤 수사 동력 잃어
박씨 진술 사실 확인 안된채 종료
검찰 캐비닛에 내사자료로 보관
박연차, 검찰에 금품 제공 ‘리스트’ 제출

이 때문에 정권 차원의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고 수사는 2라운드에 접어들게 된다. 대검 중수부는 전임인 박용석 부장-최재경 수사기획관팀이 구속한 박씨를 상대로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에 시동을 건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딸들도 처벌하겠다”는 검찰의 압박에 박씨는 돈을 준 정치인과 관료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하게 된다. 그해 3월을 전후해 작성된 리스트엔 반 총장의 이름도 포함됐다. 일부는 구체적 액수까지 적시됐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박씨가 두 손과 두 발을 다 든 채 백기 투항을 한 것”이라며 “30명 이상이 명단에 들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수사팀은 리스트를 바탕으로 계좌추적 등 사실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혐의가 드러난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잇따르면서 수사와 취재 경쟁이 가열됐다. 검찰은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인사들의 명단을 조금씩 흘렸다. 반 총장의 이름이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왔다. 박씨는 반 총장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있던 2005년 돈을 준 이유에 대해 “베트남 주석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초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진술조서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박씨의 여비서에게서 압수한 ‘회장님 일정관리표’에도 반 총장의 이름이 두 번 기록돼 있었다. 검찰은 계좌추적과 외화출금자료를 들이밀며 반 총장에게 2만~4만 달러를 준 사실이 있는지 박씨에게 물었다. 박씨는 “2007년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로 성의를 표시했다”고 진술했다. 돈을 전달한 장소는 베트남과 미국 뉴욕 등 두 곳을 놓고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수사팀 일각에선 “2000만원씩 두 차례 돈이 전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반 총장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소환이 불가능한 반 총장을 상대로 조사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데다 국가 위신만 손상시킬 뿐 실익도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금품수수 의혹이 언론 보도로 불거지면서 리스트에 포함돼 있던 다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도 함께 중단됐다.
검찰 캐비닛엔 반 총장 기록 있을 것
이후 반 총장의 대권 도전설이 나온 지난해부터 반 총장과 관련된 의혹이 정보시장을 중심으로 떠돌았다. 검찰도 여론의 동향을 의식해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된 수사 자료를 챙겨 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박연차씨의 공식적 수사기록에는 반 총장과 관련된 진술은 없었다”고 말했다. 반 총장 기록은 허공으로 떠버린 것일까. 아니다. 박씨의 진술은 내사기록보고서 형식으로 보관돼 있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피의자가 변호사 등을 통해 제출한 문건을 검찰이 임의로 파기할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편철돼 ‘검찰 캐비닛’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반 총장과 관련된 의혹은 어떻게 불거졌을까. 당시 수사팀과 일부 검사들이 갖고 있는 반 총장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 총장의 금품수수 의혹을 제기하며 대권 도전설에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작아 보인다.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만약 반 총장이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경우 사실 확인을 위한 수사가 가능하다. 결국 이번 사건은 사법적 심사보다는 정치적 공방으로 번질 공산이 커 보인다. 반 총장의 대응이 주목되는 이유다.
박재현 편집국장 대리 abnex@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