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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평양 수뇌부에 보내는 충고

중앙일보 2016.12.23 19:53 종합 31면 지면보기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2016년 끝자락을 보내는 한반도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탄핵 과정에 놓인 대통령, 예측불허의 혼돈에 휩싸인 정치권, 해를 넘겨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거리의 촛불 함성, 얼어붙은 경제지표까지. 만에 하나 여기에 안보 위기까지 덮친다면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을 면하기 어려워진다. 평양의 행보에 모두들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군사도발이나 분열 획책하면
북, 치명적 패착에서 못 벗어나
미국과 남한 권력 교체기에는
최소한 전략적 자제가 바람직
대립·긴장이냐 평화·공존이냐는
향후 수개월간 북측 행보가 관건


특히 문제는 마(魔)의 1월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키리졸브 한·미 군사연습이 시작되고 독수리 훈련이 뒤를 잇는다. 내년에는 국내 정세를 고려해 군사연습과 훈련의 강도도 한층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확장억제력 증강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미군 첨단 전략무기도 대거 한반도에 전개될 수 있다. 2017년 한 해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평양이 이러한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추가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로 대응한다면 위기 국면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북한이 ‘전략적 자제(strategic restraint)’ 같은 현실적 선택을 보여주고 대화와 협상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2009년 4월 5일을 돌이켜보자.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제로 연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몇 시간 앞두고 북한은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장거리 로켓 시험발사를 감행했다. 이날의 결정이 미국의 주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오바마의 대북 적개심과 ‘전략적 인내’ 정책, 그리고 지난 8년간의 교착으로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북한의 전략적 자제가 중요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더욱이 트럼프는 오바마와 전혀 다르고, ‘전략적 인내’ 정책을 계승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결국 미국의 선택은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핵문제 해결에 나서든, 군사적 행동을 통해 결판을 내든 둘 중 하나뿐이다. 아마도 트럼프 행정부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를 두고 신중한 정책 검토(policy review)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만일 북한이 이 기간 동안 추가 핵실험이나 ICBM 시험발사 같은 악수(惡手)를 택할 경우 새 백악관의 강경노선 선회는 불을 보듯 뻔하다.

트럼프 당선인 본인이 반사적이고 충동적인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 내정자나 마이클 플린 안보보좌관 등 주위의 참모들도 모두 군사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 행동파들이다.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겠다며 평양이 섣부른 군사모험주의에 나설 경우 파괴적인 부메랑이 되돌아올 공산이 크다. 반면에 북한이 절제된 행보를 선보인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파격적 대화 제의에 나설 개연성도 충분하다.
 미국뿐이 아니다. 서울이 정치적 격랑에 휩싸인 틈을 타 북측이 군사도발을 감행하거나 한국 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정치 개입을 시도해도 결과는 치명적 패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남측 정부가 정치적 유고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우리 군은 북의 군사적 도발에 대해 평소보다 훨씬 강력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사나리오도 이러한 상황 전개다. 둘째, 북의 정치 개입은 이제 시작되는 대선 국면에서 남북관계 개선이나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약으로 내걸 남측 진보세력에 치명타를 가할 공산이 크다. 마지막으로 북의 이러한 행보는 남측 극우세력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남북 강경파 사이의 적대적 제휴가 공고해지는 셈이다.

따라서 평양의 수뇌부로서는 최소한 미국과 남한의 권력 교체기 동안에는 전략적 자제를 취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이미 2016년 한 해 동안 두 차례 핵실험 등 비대칭 전력의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지 않았는가. 이 이상의 거들먹거림은 서울이나 워싱턴 모두를 불필요하게 자극할 뿐이다. ‘전략적 자제’의 또 다른 전제는 기존의 경직성을 버리고 미국과 한국, 중국과 대화 통로를 마련해 나가는 것이다. ‘6자회담은 죽었다’ ‘병진정책은 불변이다’ ‘비핵화는 이제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같은 말만 반복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의제가 열려 있다는 자세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새로 등장할 한국과 미국의 행정부도 열린 자세로 대화에 임할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의 정치 변화와 트럼프의 등장은 평양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극단의 대립과 긴장·파국으로 만들어 가느냐, 공존과 평화·번영의 계기로 삼느냐는 앞으로 수개월간 북측이 보여줄 행보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 그런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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