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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우리 모두 잠재적 최순실 부역자다

중앙일보 2016.12.23 19:51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당신은 갓 전입한 이등병이다. 말년 병장이 부른다. “야, 담 넘어가서 소주 한 병 사와라.” 그럼 당신은 “병장님, 술 사오는 것은 군법 위반입니다…”라고 튕길 수 있나?

‘반대의 의무’ 등 보완책 절실
제대로 민주주의 교육시켜야


이제 당신은 회사 부장이다. 이사가 부른다. “김 부장, 관청에 가서 상품권 좀 돌리지.” 그럼 당신은 “이사님, 상품권 살포는 법 위반입니다…”라고 자를 수 있나?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에게 전화해서 사표 받으라” “이 서류 어디에 전해주라”고 했을 때 경제수석, 비서는 “대통령님, 그건 안 됩니다”라고 거절할 수 있었을까.

최순실 게이트 이후 쏟아진 말의 홍수 중 가장 아프게 폐부를 찔렀던 건 “대통령 말에 토 달기 쉽지 않았다”는 조원동 전 경제수석의 신음 같은 고백이었다. 우리는 상명하복이 미덕인 땅에서 나고 자랐다. 여기에 길들여진 이들이 그저 하던 대로 했다고 우리는 그들의 이마에 ‘최순실 부역자’라는 낙인을 찍고는 돌팔매질을 한다. 그들은 그토록 악인인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유대계 미국인 작가 엘리 위젤. 그는 1945년 나치 전범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 갔다. 그러곤 벌거벗은 진실에 경악했다. 전범 대부분이 명령에 순종한, 평범하기 짝이 없던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허물이라면 의무에만 충실했을 뿐 피해자의 고통에 무심했던 게 다였다.

‘악의 평범함’과 마주한 위젤은 이렇게 썼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심함이다. 삶의 반대도 죽음이 아닌 무심함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통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든 악인이 될 수 있는 거다.

최순실 사건을 계기로 뉴욕타임스(NYT)가 대형 기사를 실었다. 한국·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스캔들로 얼룩진 나라에서는 이들 사건이 비리 척결의 계기가 될 거라는 얘기였다. 슬프게도 NYT마저 지식인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세상은 합리적으로 돌아갈 거라는 착각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선 개선의 기미가 도통 안 보인다. 잡아 족치는 데만 눈이 벌개져 제도적 보완은 나 몰라라다. 이러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오면 온 사회가 대선 정국이란 블랙홀에 빨려들 게 뻔하다. 똑같은 시스템에, 역시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비슷한 사단이 일어날 게다.

차제에 독일식 ‘공동 의사결정’ 시스템을 들여오자는 의견도 있다. 76년 시작된 이 제도는 정치권·사기업을 막론하고 주요 결정 모두를 리더 개인이 아닌 참여자 전원의 합의하에 이뤄지게 의무화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나 독단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다. 공무원법에 아예 ‘반대의 의무(obligation to dissent)’를 박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수용하면 아예 법으로 처벌하는 방안이다.

뭐가 특효약일지는 전문가가 가릴 일이나 확실한 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분석에는 허점이 있었지만 NYT가 부패 척결 방안으로 제시한 ‘양심의 섬(Island of honesty)’ 이론은 그럴듯하다. 부패의 바다에서 양심의 섬, 즉 건전한 조직이 하나 둘 나타나 서로 연결되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논의가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하나다. 사회 전체적인 면역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병균이 어디에 침입해도 백혈구가 달려들어 물리치듯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로 무장하면 부패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긴 호흡으로 민주주의와 윤리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사필귀정이 물처럼 흐르는 풍토도 확립해야 한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이야말로 근원적 치료법이다.

위젤은 이렇게 썼다. “힘이 달려 불의를 막지 못할 때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불의에 항거하지 못할 때는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 부역자가 되지 않으려면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불의에 맞설 능력과 의식을 길러줘야 하는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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