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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오늘 밤은 ‘새옷 입은 옛날 술’

중앙일보 2016.12.23 00:03 Week& 6면 지면보기
| 인기 끄는 전통술 전문 주점

전통술 하면 명절 선물로 주고받는 ‘옛날 술’ 이미지가 강하다. 막걸리나 약주라는 말에는 자동적으로 학사주점·민속주점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요즘 인스타그램에 전통술·전통주를 치면 ‘핫플레이스’라는 해시태그(#)와 같이 올라온 사진들이 허다하다. 고운 조명 아래 탐스러운 그릇·잔에 따르는 모습을 ‘트렌드 인증’ 하듯 올려놓는다. 아예 전통술만 특화한 주점과 바(bar)까지 생겨났다.

 
전통주를 트렌디하게 즐길 수 있는 전문 주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 바(bar) 스타일 전통주점 ‘작’의 오너 바텐더 강병구씨가 조선 3대 명주로 일컬어 지는 죽력고를 이용한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전통주를 트렌디하게 즐길 수 있는 전문 주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 바(bar) 스타일 전통주점 ‘작’의 오너 바텐더 강병구씨가 조선 3대 명주로 일컬어 지는 죽력고를 이용한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역삼역 6번 출구에서 골목 안쪽으로 꺾어들면 ‘작(酌)’이라는 바(bar) 간판이 보인다. 지난 10월 문을 연 이곳은 전통술만 취급한다. 상호는 ‘달 아래서 홀로 술잔을 기울인다’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따왔다. 증류주 27종과 탁·약주 14종 등 총 40여종의 전통술을 파는데 이 중 24종은 잔술(평균 7000원)로도 판다. ‘고진감래’ ‘백일몽’ 같은 이름의 전통술 베이스 칵테일도 17종 마련돼 있다.

‘작’의 오너 바텐더인 강병구(39) 대표는 IT업계에서 일하다가 2012년 취미 삼아 전통주 빚기를 배우고선 그 매력에 빠졌다. 업장 구상 때부터 “전통술의 올드한 이미지를 씻는 한편, 다양한 술을 한 잔씩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원해” 위스키 바 형태로 차렸다. 카운터 좌석 정면에 백 바(back bar)를 설치해 여러 종류의 술을 진열해 놓고 잔도 도자기류가 아니라 모던한 글라스 잔으로 구비했다. 메뉴도 문어숙회·육전·야키우동 등 일식 이자카야 느낌의 깔끔한 일품요리 위주다. 강 대표는 “처음엔 전통술을 즐기려고 찾아오는 애호가가 많았지만 요즘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 여성과 전문직 남성들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출시되는 전통주들은 병 디자인에서도 젊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부터 문배술, 고운달, 진 도홍주, 고소리술, 문경바람, 매실원주.

최근 출시되는 전통주들은 병 디자인에서도 젊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부터 문배술, 고운달, 진도홍주, 고소리술, 문경바람, 매실원주.


지난 6월 문 연 신사동 ‘백곰 막걸리&양조장’(이하 ‘백곰’)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전통주를 취급하는 주점이다.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만 총 200종(막걸리 43, 약주 70, 소주·증류주 87종)에 달한다. 이곳 대표 이승훈(40)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우리술에 꽂혀 2010년 말 사표를 내고 전통술 업계에 본격 발을 디뎠다. 한국막걸리협회 사무국장, 우리술 주안상대회 조직·심사위원 등을 거치면서 현재의 아내 유이진(31)씨도 만났다. 부부는 보증금 3억원을 포함해 총 자본 6억원을 마련해 압구정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총 95평(약 314㎡·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현재 업장을 열었다. 이 대표는 “처음 구비했던 전통술은 120종이었는데 매달 새로운 술이 10여종 추가될 정도로 신진 양조장도 늘어나고 기존 업체도 신상품 출시가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전통술은 민속주점이나 한정식 집에서나 만나는 ‘고리타분한 술’로 이해됐다. 요즘은 이렇게 전통술만 취급하는 전문점이 생기고, 브랜드 자체도 수십 수백 종을 헤아릴 정도로 다채로워졌다. 이런 전문점은 희석식 소주나 대기업맥주를 취급하지 않는데다 인테리어도 현대적인 기물과 조명 등으로 이뤄져 기존 민속주점과 차별화된다.

전통술 유통업체 ‘부국상사’의 김보성 대표는 “2008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업장에서 취급하는 전통술이란 게 안동소주·문배술·이강주·한산소곡주 등 ‘빅4’에 불과했다”고 돌아봤다. 양조장들이 대체로 영세해서 전국 유통망을 갖고 있지 못해 지역 상권 안에서만 소비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막걸리 고급화에 힘입어 전통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양조장·유통업체 양측의 노력으로 판로가 정비되면서 조금씩 전통술의 ‘전국구화’가 이뤄졌다. 여기에 클럽주 ‘르깔롱’(전남 담양 추성고을 생산)처럼 젊은 층 기호를 겨냥한 신상 브랜드가 잇따라 나오면서 소비층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김 대표는 “올해만 거래처가 200곳 이상 늘어 현재 주점·식당·호텔·클럽을 통틀어 1200곳에서 전통술을 취급한다”고 말했다.

이런 전문점의 효시라 할 곳은 2013년 12월 문 연 이태원 경리단길 ‘한국술집 안씨막걸리’다. 전통술만 취급하되 그 중에서도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은 순도 높은 품종들만 골라서 30여종을 선보였다. 안상현(33) 대표는 “화학조미료(MSG)가 음식 맛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듯 전통술도 자연 발효된 것이 풍부한 맛과 향을 내는데, 소비자들에게 이런 고품질 전통술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안씨막걸리’는 트렌디한 분위기와 고급 술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 층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 3년 만에 매출이 3배로 늘었다. 장사가 잘 되자 지난 9월 300m 떨어진 곳에 2호점 격인 ‘한국술집 21세기 서울’(금·토만 영업)도 열었다. 2호점은 1호점보다 주방을 10배로 키워 수준 높은 음식과 함께 우리 술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우리 경쟁 상대는 싱글몰트 위스키바나 이자카야”라는 안 대표의 호언처럼 이들 업장을 찾는 고객 90%가 20·30대 젊은 층이다.

기존 주점이 전통술 전문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1992년 문을 열어 홍대 앞 터줏대감으로 영업해온 민속주점 산울림은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오픈 키친과 바 좌석을 도입하고 이름도 ‘산울림 1992’으로 바꿨다. 일부 손님을 위해 소주(한라산)와 맥주도 팔긴 하지만 주력은 전통술(막걸리 27종, 약주 36종, 증류주 40 등 100여종)이다. 오너 셰프인 홍학기(44) 대표는 “요즘 젊은 고객들은 ‘오크향 풍기는 문경바람(사과 증류주)을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선호하는 전통술의 세세한 개성까지 꿰고 있다”면서 “업장도 이런 취향에 맞춰 전문화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술 콘텐트 전문 ‘대동여주도’의 이지민 대표는 “여러 양조장에서 고품질 술이 나오는데다 젊은 입맛에 맞춘 업장의 전문·고급화가 계속되면서 전통술 즐기기 트렌드가 확산되는 중”이라고 말했다.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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