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거진M] 함부로 거부하지 못할 욕망의 눈빛, '마스터' 이병헌

중앙일보 2016.12.22 15:07
셔터 소리에 맞춰 이병헌(46)이 리듬을 타듯 포즈를 바꿨다. 고개의 각도와 손목의 위치는 섬세하게 계산된 듯했다.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어떻게 비칠지 완벽히 알고 있다는 듯. “BH는 우아한 배우죠!” 할리우드 서부·액션영화 ‘매그니피센트 7’(9월 14일 개봉)에서 그를 황야의 ‘아름다운(Magnificent)’ 무법자 중 한 명으로 발탁했던 안톤 후쿠아 감독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1991년 데뷔 후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온 이병헌. 그러나 배우로서 그의 매력은 외려 나사 하나 빠진 듯 소탈한 순간에 더 도드라졌다. 이를테면 멜로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1, 김대승 감독)에서 연인 태희(이은주)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무서워 쩔쩔매다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 같은. 올해 국내 유수 영화 시상식에서 이병헌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의 처량한 정치 깡패 안상구는 또 어떻고.

‘마스터’의 진 회장은 다르다. 그는 일확천금의 추악한 욕망만을 모아 빚은 듯한 사내다. 피라미드식 금융 사기에 대해서도 “‘흙수저’로 살다 죽을 사람들한테 아주 잠깐이라도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라 천연덕스레 말한다. 진 회장이 어디서 무엇을 하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시나리오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김지운 감독)의 ‘나쁜 놈’ 박창이에겐 ‘최고가 되고 싶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는데, 이 인간에겐 그런 것도 없어요. 앞뒤 가릴 것 없이 끝까지 나쁜 놈이어야 했죠. 극 중 상황에 따라 유발되는 웃음이 자칫 진 회장에 대한 친근감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어요. 그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어요.”

그런 만큼 그는 모든 장면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진 회장이 원네트워크 회원들 앞에서 거짓으로 호소하는 장면의 연설문은 “관객에게도 그 내용이 와 닿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의석 감독과 의논하며 열 번 가까이 수정했다.

무엇보다 ‘마스터’가 이병헌을 붙든 것은, 진 회장이 신분을 바꾸며 끊임없이 변신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배우에게는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캐릭터 외형에 대해서는 감독님·분장팀과 한두 번 만나 방향을 정하거든요. ‘마스터’는 네 번 이상 만났어요. 세 번째 미팅에서 제가 흰머리를 제안했죠. 상대에게 신뢰를 줄 만큼 살짝 희끗희끗한 컬러로 인물의 연륜을 보여 주자고요. 극 중 진 회장이 필리핀에 넘어가는 순간부터 흰머리 양이 엄청 많아져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머리칼을 탈색했죠. 요즘은 3~4㎜가량의 짧은 수염도 붙일 만큼 기술이 발달했어요. 분장 효과는 그렇게 대단한데, 그 가려운 정도가…. 사극 분장의 다섯 배는 더 고통스러웠죠.”

차기작 ‘싱글라이더’(이주영 감독) 촬영이 끝나자마자 날아간 필리핀 마닐라 오픈 세트는 돼지 도살장 근처였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돼지들의 비명과 썩은 냄새가 뒤섞인 곳이었다. 지독한 피비린내 속에서 엄청난 모기 떼와 싸우며 로케이션 촬영이 한 달쯤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내부자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52회 백상예술대상, ‘매그니피센트 7’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등에도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고생담을 들려줄수록 이병헌의 입가에 슬그머니 즐거운 미소가 서렸다. “재미있는 애드리브를 고민하다가, 혼자서 한참을 웃기도 했다”면서.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김)우빈에게 놀랐어요. 순발력도 좋고, 대사 자체를 맛깔나게 표현해요. 배우끼리는 어떤 신에서 ‘저 친구, 제법 잘 논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마스터’ 편집본을 보는데, 처음 시나리오 리딩할 때 봤던 박장군과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매일 친구들이랑 술 먹었다고 하고선(웃음), 집에서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만큼 연구했구나’ 싶었죠.”

극 중에서 두뇌 싸움을 벌인 김우빈의 전작 ‘스물’(2015, 이병헌 감독)도 봤다며 이병헌이 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놨다. ‘마스터’에서 그 자신의 맛깔스러운 위트를 눈여겨볼 만한 장면은 없을까.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진 회장이 필리핀 정치인에게 사기를 치는 장면이요. 하버드대학교 출신에, 영어를 미국인처럼 말하는 후배가 있거든요. 그 친구가 동남아 사업 상대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완전히 동남아식 영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일하기에 편하다고요. 이거다 싶었죠. 많은 관객이 웃을지는 모르겠지만….”

신나게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쑥스러워하는 것은 이병헌의 버릇이다.

정·재계 이슈를 다룬 ‘마스터’가 어지러운 시국에 영향받을 우려는 없을까.

“운명이라 생각해요. 요즘 현실이 워낙 ‘익스트림’하잖아요. 제 경우에도 이제는 정치가나 대통령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읽으면, (현실에 비해) 시시하고 감정 이입이 어려워요. 최근 10년간 사랑받은 정치·범죄영화가 한동안 잠잠하지 않을까요.”

현재 경북 문경 등에서 김윤석·박해일·고수·박희순 등과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을 그린 사극 ‘남한산성’(황동혁 감독) 촬영에 한창인 이병헌.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잠시 치욕당하더라도 임금과 백성을 지켜 내려는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아 반대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에 팽팽히 맞선다. 그보다 먼저 관객을 만날 영화는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수년 전 출연을 결정한” ‘싱글라이더’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아내와 아이를 만나기 위해 호주로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공효진이 아내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이병헌은 “결혼 전에는 부모 마음을 못다 헤아릴 것 같아 아버지 역을 여러 번 고사했다”“어떤 작품은 너무 마음에 들어 감독님에게 5년만 기다려 달라고,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했던 적도 있다”고 웃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되어 보니, 아이를 마주 보거나 아이와 함께하는 신에서 감정 자체가 달라요. 더…, 짙다고 해야 하나.”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없어 1년 넘게 쉰 적도 있다”는 이병헌은, 요즘 좋은 작품을 잇달아 만나며 쉴 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 가는 요즘, 그곳에서 예술영화 출연을 제안받기도 했다. “블록버스터에 출연해 할리우드에서 조금 더 얼굴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과 “온전히 연기력을 발휘할 역할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엇갈린다. 한편 안톤 후쿠아 감독이 ‘스카페이스’(1983,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리메이크 버전 연출자로 거론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은근히 어필한 적도 있다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살펴보려 해요.” 데뷔 26년 차, 다시 새로운 꿈을 꾸는 그의 눈빛이 소년처럼 빛났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장소 협찬=스튜디오 제이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