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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희망은 늘 저만치에서 오고 있다

중앙일보 2016.12.22 00:22 종합 30면 지면보기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어떤 분이 손편지를 보내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 불의의 사고로 이곳에 오게 됐다는 20대 후반의 K씨는 요즘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힘든 나날 속에서도 베풂의 삶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현실이지만 나이 드신 분이 목욕할 때 등을 밀어주고 정신지체인의 식사를 챙겨주고 있다고 했다. 베푸니까 행복하고, 베푸니까 청춘이고, 그 속에서 긍정의 힘을 부여잡고 있다고 했다.

K씨만 힘든가. 감호소 바깥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살림살이는 갈수록 힘들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수많은 독거노인은 추위보다 더 가슴 시린 외로움에 쓸쓸히 삶의 마지막을 마주하고 있다. 양극화는 한계 상황에 다다랐다. 통계청이 지난 19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3분기 월평균 지출이 100만원 미만인 가구가 전체의 13.0%나 됐다. 100만~200만원인 36.1%까지 합하면 거의 절반(49.1%)에 해당하는 국민이 월 가구 지출액 200만원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화려한 도시의 착시효과 탓에 모두들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는 것 같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출구 없는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는 또 어떤가. 이들의 삶을 챙기는 게 정치의 본령일 터인데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과 기득권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려 나섰지만 모순과 뒤틀림은 생각보다 깊다.

그렇다고 현실의 무게에 언제까지 짓눌려 지낼 수만은 없다. 오늘의 삶이 힘들지라도 내일의 희망마저 버리고 살 수는 없다. K씨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찾아올 거라는 희망 말이다.

‘여왕 배우’로 유명한 헬렌 미렌은 18세 때 연기를 시작했지만 이름이 알려진 것은 40대에 이르러서였다. ‘더 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처음 수상한 것도 61세 때인 2006년이었다. 그는 “세상엔 전혀 고통받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힘겹게 싸워나가야 하고 수십 번 쓰러져도 다시 전진해야 한다. 그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했다.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가 주는 메시지도 이런 것 아니겠나.

사흘 뒤면 성탄절이다. K씨가 있는 그곳에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을까. 그는 산책길에 찾았다는 네 잎 클로버를 편지에 동봉해 왔다. 그 답례로 희망이란 마음의 선물을 보낸다. 지난 한 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억울한 일, 잠 못 이루는 일이 훨씬 더 많았겠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꿋꿋이 살아가자고. 셰익스피어가 “지옥엔 아무것도 없다. 모든 악마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세상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푸시킨의 고백처럼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행복과 행운이 지금 우리 곁에 없다 해도 슬퍼하지 않음은 희망은 늘 저만치에서 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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