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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40. 제8요일의 남자

중앙일보 2016.12.22 00:01
싸늘한 기운에 잠에서 깨었다. 목에 닿는 이불깃이 칼칼하게 서 있는 걸 보면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 뜬 눈으로 핸드폰을 켰다. 새벽 6시. 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든 밖은 온통 짙은 어둠이었다. 아직 한 시간 쯤은 더 누워 있어도 될 시간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에프의 체취가 날아들었다. 어젯밤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든 탓인가. 그를 못 본지 5개월인데 그의 냄새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이라도 이불을 들썩이면, 이 선물처럼 날아든 에프의 체취가 홀연히 사라질까 두려워 조용조용 숨을 죽이며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너는 내 고향이야... 그는 늘 내게 자신의 고향이라 말했었다.
 
‘그 곳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으며 무너뜨릴 수 없는 곳이다. 왜냐면 그 곳은, 저 깊은 심연 속에 마련된 고유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파리에 남겨놓았던 노트에 그는 고향을 이렇게 그렸었다.

그에게 정말 나는 고향이었을까. 그립고 정든 사람이며, 잊을 수 없는 어떤 기억이며, 따뜻하고 평온하며 안기고 싶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런 곳이었을까 그에게 나는.
 
일곱 명의 남자와 딱 7분의 1만큼 씩 내 마음을 나누겠다 맘먹고 남자들을 만났지만 명확히 감정을 배분하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프에게 마음자리를 많이 내어주면서 부터 나는 늘 불안했고 또한 슬펐다.
 
튜즈의 말이 옳았다. 나는 사랑을 못 믿었던 게 아니라 사람을 못 믿었던 거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믿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에프에 대한 감정이 깊어갈수록 나의 그런 느낌조차 허상이 아닐까 혼란스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모두 끝났다. 나와 만났던 일곱 명의 남자에게 어떻게든 내 잘못된 감정에 대한 해명을 했다. 가장 미안함이 많았던 튜즈에게 까지....
 
회사 앞에 나를 내려주곤 뒤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나던 튜즈의 뒷모습이 마음에 밟힌다. 튜즈는 먼저 나를 쳐다봐주었고,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었다. 헤어지면서도 언제나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손 흔들고 또 흔들어주던 그였었다.
그런 그가 단숨에 핸들을 돌려 도로로 미끄러져 나갔다. 미안함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하지만 미안함과 사랑은 별개의 일인 것. 사랑 속에서 미안함을 가질 수는 있지만 미안함 때문에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프는 단 한번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다. 결국 마지막 만남이 돼버린 그날이었다. 그 말을 그냥 흘려버린 이유로 나는 이후 오랜 동안 그 말을 되짚어야 했고 그 말 때문에 아파야 했다.
 
“방금 들어온 뉴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잔걸까. 오전 8시에 맞춰놓은 티비 알람이 켜지면서 티비 소리가 살풋 잠든 나를 흔들었다.
 
“대통령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사건으로 시국이 불안정한 가운데, 거대 여당의 실세이며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한정현 전 장관이 잠시 후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입니다.”
 
눈을 떴다. 아니 귀가 먼저 떠졌다.
 
“방금 들어온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기 대선주자인 한정현 전 장관이 현재 본인이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정치계 주변에선 대선출마 선언으로 보고 있으며 각 야당의 후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결국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더듬어 침대 헤드에서 태블릿 피시를 찾아 들었다. 이런 식의 결말에 이르고 싶지 않았을 뿐,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눈을 채 뜨지 않고 태블릿 피시 전원을 켰다.
 
“저는 지금...”
 
카메라 플래시 소리와 함께 한정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한정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에서 맡고 있는 모든 직위와 권한을 내려놓고 정치와 관련된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나도 모르게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기자회견을 연 곳은 전날 내가 방문했던 그의 호화스런 입원실이었다. 그는 링거가 매달린 휠체어에 앉아 담담히 자신이 쓴 원고를 읽어 내렸다.
 
“또한 내 사위이며 정치계 후배였던 국회의원 장현수의 사망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촉구합니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 제가 연루돼 있다면 기꺼이 경찰 조사를 받겠습니다.”
 
며칠 만에 훌쩍 늙어져 보이는 그의 얼굴에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한 순간 연민이 일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한정현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에프의 죽음에 그가 직접 개입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를 둘러댄다 해도 에프의 죽음의 배후는 분명 그였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한정현에 대한 분노와 에프에 대한 아픔이 함께 섞여 내 안에서 불길로 치솟았다.
 
외출 준비를 하는데 쥬디의 전화가 울렸다.
 
“기자회견 끝나고 회사 들어가는 길인데.. 너네 집 앞 지나고 있어. 잠깐 볼래?”
 
“나가려던 참이야. 장현수 오피스텔..”
 
“나와. 데려다 줄게. ”
 
쥬디는 차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기분 좋게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결된 건 순전히 선배 덕분이야. 선배 없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거야. 정말 고마워.”
 
“그 말이 왜 우리 사이에 선을 확 긋는 느낌이 들까...”
 
쥬디가 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쥬디의 날카로운 눈매는 내 마음을 꿰뚫는 듯 매서웠다.
 
“선배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정말 고마워 선배...”
 
그 말이 기분 좋았는지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사실 나는 나대로... 장현수한테 부채감 같은 게 있었어. 언젠가 한정현 패거리로 한데 묶어서 막 몰아세운 적이 있거든.”
 
정말 홀가분한 듯 쥬디의 표정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도 그동안 여러 가지 힘든 과정이 있었다는 걸 알지만 내게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차는 금방 에프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닿았다.
 
“여기에 너를 데려다 주면서 이 일이 시작이 됐던 건가?”
 
차를 세우며 쥬디가 쓴 웃음을 웃었다.
 
“다른 남자 만나고 있었다는 게 그 당시 내겐 좀 충격이긴 했지. 그게 하필 장현수라는 게 더...”
 
쥬디의 씁쓸한 웃음에 내 가슴이 콱 막혀왔다.
 
“많은 남자들을 만났던 건... 결국은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거란 걸 알게 됐어.”
 
쥬디의 금테 안경이 반짝 빛을 내며 내 쪽을 향했다.
 
“사랑도 어차피 이기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거야. 전적으로 이타적인 감정은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지?”
 
쥬디는 말 없이 앞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 선배 좋아했어. 다른 사람들도 함께였지만 선배에 대한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사랑이 오가는데.. 서로가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있나.. 물론 그 크기가 같은 건 아니지만.. ”
 
언젠가 오비서관이 에프의 캐리어를 들고 서 있던 곳에 강아지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길을 잃은 강아진가 가만히 보니 주인인 꼬마가 얼른 달려와 강아지를 안았다. 강아지는 주인이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볼을 마구 핥았다.
 
“너니까... 반미주니까... 모든 게 다 이해됐어. 그러니까 미안할 거 없어... 다만 네가 사랑이라는 걸 머리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판단하지 않길 바랄 뿐이지... 사랑은 가슴을 다 열어놓고 나 자신을 다 내어놓고 하는 거야. 그게 사랑이야.”
 
쥬디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강아지를 꼭 안은 채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강아지를 꼭 껴안은 소년의 모습이 내 눈에 잔상으로 남았다.
 
“다음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가 내게 줄 상처까지 모두 떠안을 각오를 하고 진짜 한번 사랑 해보고 싶어.”
 
쥬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위해 내 마음을 다 바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이란 그 상처까지 떠안는 게 진짜 사랑 아닐까?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피한다면 죽음이 두려워 삶을 포기하는 것이랑 같을 거야. 나는...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봤는데... 그걸 이제야 알아버린 기분이야.. ”
 
늘 당당하고 어디서도 자신을 굽히거나 낮추지 않는 쥬디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고마워 선배.”
 
내가 손을 내밀었다. 쥬디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 악수가 의미하는 것을..
 
“아 참.”
 
차에서 내려서는데 쥬디가 말했다.
 
“전에 그 편의점 알바 고등학생 기억나지?”
 
“내 폴더폰 가져가려 했던 그 학생?”
 
“그 녀석 공부 제법 하더라. 나 걔 학비 보조해주기로 했어. 너도 좀 보태.”
 
“굿 아이디어. 내게도 계좌 보내줘.”
 
쥬디의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에프의 오피스텔 패스워드는 내 생일 번호 그대로였다. 비뚤어진 액자며 사진이 든 박스며 내가 떠난 후 그 누구도 여길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박제된 시간 속에 갇혀있던 공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제 정말 다시 이 곳을 올 일은 없을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그곳은 편한가요? 아프거나 슬프진 않나요? 그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물을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이곳에 함께 머물렀던 당신에게... 그리고 이 공간에게... 감사했단 인사하러 왔어요.
어디선가 그가 들어주길 바라며 내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혼란과 혼돈이 함께 했던, 늘 행복하지 만은 않았던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은 분명 나를 존재하게 한 나의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아름답게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당신은 떠났지만 내가 다 기억할게요. 당신은 잃었지만 내가 다 간직할게요.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서 편히 쉬어요.
 
파리 사크레퀘르 성당에서 그를 위해 양초를 켰던 때처럼 그를 위해 마음을 담아 기도를 했다.
 
계속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한연수의 번호였다. 방해 받고 싶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나요...”
 
뜻밖에도 한정현이었다.
 
“내가... 반미주 협박에 졌다고 생각하지는 마시오...”
 
“이기고 지는 게임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다시 말하지. 내게 보여준 관대함에 백기를 들게 된 거라고.. 관대함은 그 자체로 큰 힘이라는 것을 반미주가 알려줬소.. ”
 
“......”
 
“그래요... 나는 나를 포기하는 대신 내 딸아이를 구하기로 했소.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길 진심으로 바라오.”
 
그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나는 할 말이 많았다. 이렇게 용서를 할 수 없다거나 에프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한다거나 해야 할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없어 잠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반미주씨...?”
 
곧 끊어질 줄 알았던 핸드폰에서 한연수의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듣고 있나요? 한연수입니다.”
 
“말씀하세요.”
 
“이런 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아직도 당신들 두 사람의 사랑... 인정하지 못해요.”
 
“.....”
 
“남편은 영원히 제 남편이에요. 그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언젠가 화해를 하고... 다른 부부들처럼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미주씨 한텐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겠어요.”
 
긴 침묵이 그녀와 내 사이를 지나갔다.
 
“아닙니다.. 사과는 제가 드려야죠..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미주씨가 내 남편 장현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건 인정할게요. 그에게 좋은 친구여서... 내가 그 사람에게 덜 미안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 ”
 
그녀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그녀도 나처럼 목소리가 젖어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짐들을 다 내려놓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막 날아갈 것 같죠?”
 
아트였다. 분명 내가 아는 그 아트의 목소리 였다. 돌아보니 바로 그였다. 반가움에 당장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는데 병원이 사람만 잡아놓고 이렇게 고생을 시키지 뭡니까?”
 
분명 내가 들은 목소리는 바로 그였는데... 내 앞의 그는 어제 병원에서 만난 낯선 아트였다.
 
“도대체 정체가 뭐죠? 이젠 더 궁금할 일도 없지만...”
 
어제 병원에서 만난 아트는 그 동안 내가 알던 아트가 아니었다. 똑 같은 얼굴로 똑 같은 어투로 말한다고 해도 그가 아니었다. 혼돈스러웠다. 아트가 의도적으로 내게 이럴 이유가 있을까..?
 
“제 정체가, 뭐요? 제가 뭐 이상한 짓 했습니까? 이마 조금 다친 것 뿐이에요. 뇌를 다친 게 아니라구요.. 저 다 기억해요. 잠시 기억이 흐릴 뿐이지 멀쩡하다니까요.”
 
“닉네임이 아트죠? 네팔어로 여덟이라는 숫자를 의미하더군요. 8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뭔가요?”
 
“아... 대학때 친구들이 저를 아트라고 부른 건, 제가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데 시험만 치면 A학점이라고... 학점이 완전 예술이라고 놀리면서 만들어진 별명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내 별명이 네팔어로 8이라는 숫자를 의미한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대학 때 히말라야 트래킹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정말 멋진 일출을 봤거든요. 히말라야 제8봉인 마나슬루봉 아래서.. 그때 사람들이 마나슬루봉이 영혼의 산이라고... 8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은 나요. 나는 뭐 관심 없지만.. ”
 
내가 보기에도 그는 분명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구들이 닉네임을 붙여준 대로 그가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면 그건 정말 가히 예술이라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기억하나요?”
 
“시녀들? 현수형이랑 스페인에서 본 그 그림 말하는 건가요?”
 
분명 그는 지난번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아는 아트인지 알 수 없었다.
 
“미주씨는 어떻게 알아요? 현수형한테 들었었나요? 예전에?”
 
그가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 그럼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피카소의 시녀들 이야기 한건 기억나요? 벨라스케스의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 기억이 나요.. 분명 뭔가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내용이 기억이 안나네요..”
 
그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아트는 그럼 누구며 어디에 있단 말인지..
 
“그건 기억나요. 미주씨가 현수형 이야기하면서 힘들어 했던 거... 그리고 다른 남자들 이야기도 했었죠. 그래서 제가 뭔가 조언을 했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할 건 없었다. 궁금하다면 이전에 만났던 아트의 정체가 궁금할 뿐.
 
“이런 기분 있죠? 숲은 잘 알 것 같은데 나무 하나하나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렇군요.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숫자 8이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내 별명이 아트라서 여덟 번째? 뭐 그런 의미를 가지는 건가요? ”
 
“아뇨. 어차피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없다니요?”
 
“제 8요일의 남자...”
 
“제 8요일의 남자?”
 
“그는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탈출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현실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
 
“어차피 여덟 번째 요일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에게 감사했다는 말은 하고 싶었는데... 이제 너무 늦어버렸네요.”
 
“참, 제 이름 모르시죠? 여기....”
 
아트가...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아트가.. 명함을 꺼냈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내가 아는 아트가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그와 나는 헤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천천히...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에프의 오피스텔에서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림=이정권 기자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19. 내가 몰랐던 것
#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24. 파리의 하늘 밑
#25. 시녀들
#26. 에프.. 당신의 기록
#27. 그의 태블릿pc를 찾다
#28. 침입자들
#29. 비밀의 문
#30.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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