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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포장 뜯지 마세요, 인증샷에 양보하세요

중앙일보 2016.12.21 00:01 강남통신 6면 지면보기

까르띠에 케이크·초콜릿 달력 등 ? 웃돈도 마다않는 ‘고급 포장’ 시대

‘포장이 번지르르하다’는 말, 더 이상 흉이 아니다. 포장은 제품 완성의 마침표다. 받는 사람에겐 물건의 첫인상이자 ‘티저 광고’ 같은 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은 우리 시대에 더 잘 맞는지 모른다. 번듯한 포장이 사람 마음을 훔치고,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인증샷’을 남기는 게 남세스럽지 않은 게 현재의 문화 트렌드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하루에 하나씩 빼먹을 수 있도록 ‘어드벤트 캘린더’ 형태로 꾸며진 ‘라메종 뒤 쇼콜라’의 초콜릿 포장 박스. 24개 칸마다 다양한 맛의 초콜릿이 들어있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하루에 하나씩 빼먹을 수 있도록 ‘어드벤트 캘린더’ 형태로 꾸며진 ‘라메종 뒤 쇼콜라’의 초콜릿 포장 박스. 24개 칸마다 다양한 맛의 초콜릿이 들어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소비자들은 포장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있어빌리티(있음+어빌리티·ability)’를 소유하고자 한다. 가령 포시즌스 호텔 서울이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와 협업·판매하는 케이크를 보자. 3만9000원짜리 화이트 사각 케이크를 로비 라운지에서 즐기면 커피 혹은 차(1만원 상당)를 함께 제공받는다. 하지만 이 커피(차) 서비스는 테이크아웃 땐 제외된다. 일반적인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할 때 받을 수 있는 혜택과는 정반대다. 그럼에도 구매고객 70%가 까르띠에 로고가 들어간 포장 박스에 담아가는 테이크아웃 쪽을 택했다. 케이크의 희소가치를 인증해주는 게 이 박스이기 때문이다. 윤소윤 포시즌스 홍보팀장은 “인스타그램에서 ‘까르띠에케이크’를 검색하면 포장박스 사진이 빠지지 않을 만큼 구매객들이 포장에 만족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와 협업해서 선보인 포시즌스호텔의 케이크(왼쪽)와 박스.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와 협업해서 선보인 포시즌스호텔의 케이크(왼쪽)와 박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때도 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 등에 입점해있는 미국 시카고산 수제 팝콘 브랜드 ‘가렛팝콘샵’에선 팝콘 구매 때 종이백에 담거나 원통 틴(tin)에 담아갈 수 있다. 가장 잘 팔리는 시카고 믹스를 스몰사이즈(140g)로 샀을 때 종이백은 4200원이다. 거의 비슷한 양(145g)이 들어가는 쿼트 틴은 1만3800원이다. 그런데도 올 1월부터 지난 10월까지 틴 구매 비중이 5명 중 1명꼴(20.14%)이었다. 특히 시즌별 한정 디자인이 나왔을 땐 틴 판매 비중이 더 올라가서 지난 2월 화이트데이 기념 ‘플래티넘 틴’ 판매율은 전체 매출의 27.2%를 기록했다. 팝콘 자체는 비주얼상 차별화되기 어렵지만 독특한 외양의 틴이 ‘인증샷’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카고산 수제팝콘 ‘가렛 팝콘샵’의 크리스마스 에디션 틴 케이스(쿼트 사이즈)
미국 시카고산 수제팝콘 ‘가렛 팝콘샵’의 크리스마스 에디션 틴 케이스(쿼트 사이즈)
포장에 힘을 주는 건 비주얼을 중시하는 디저트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다. 한국 디저트 시장은 그야말로 폭발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국내 디저트 시장은 2013년 3000억원에서 지난해 1조5000억원으로 2년 새 5배로 성장했다. 올해 시장규모는 2조2000억원으로 예상되고 있다.

뻗어가는 시장에선 제품 차별화·고급화가 필수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제과·제빵업계의 포장 유료화는 마카롱·컵케이크처럼 해외에서 들어온 고급 디저트들이 주도했다. SPC그룹 디자인센터 동민호 선임디자이너는 “2000년대 중반 패션5 같은 고급 디저트 카페·브랜드가 생겨나고 수제초콜릿·마카롱·스프레드류가 보편화되면서 포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면서 “당시만 해도 고급디저트를 본인이 먹기보다 선물 용도로 살 때라서 돈을 내고서라도 예쁘게 포장해 가려는 수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패션5는 오픈 초기부터 마카롱 등을 살 때 일반 봉지에 담는 것 외에 박스 포장을 하면 추가비용(2000~3000원)을 받았다. 그러면서 유료화된 포장박스에 브랜드 정체성을 담고 디자인과 기능성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SPC그룹 디자인센터 안에는 파리크라상·파리바게트의 패키지 디자인을 연구하는 전문 조직도 있다.
 
앤티크한 수제 제과 ‘라 꾸르 구르몽드’의 버켓틴 케이스.

앤티크한 수제 제과 ‘라 꾸르 구르몽드’의 버켓틴 케이스.

요즘은 아예 포장 박스만 별도 구매·수집하는 컬렉터들도 있다. 프랑스산 앤티크 수제 제과 ‘라 꾸르 구르몽드’는 이런 수요가 많은 상품 중 하나다. 중량과 형태에 따라 3종류의 틴 케이스에 제품을 담아 파는데 이런 패키지 상품은 3만~5만원대다. 그런데 낡은 동화 속 일러스트 같은 디자인의 틴 케이스 자체를 인테리어 소품 용도로 구입하려는 이가 적지 않아 롯데백화점 본점 매장에서 틴 케이스 자체만 매주 10여개씩 팔리고 있다. 디스커버리(6000원), 고메(9000원), 버켓(1만5000원) 가운데 가장 인기 많은 게 목가적인 전원 풍경의 디스커버리라고 한다.

이에 호응하듯 각 브랜드들은 시즌별 스페셜 에디션을 내놓아 새로운 감각과 재미를 느끼게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내놓는 프리미엄 초콜릿 브랜드 ‘라메종 뒤 쇼콜라’는 올해 어드벤트 캘린더(Advent Calendar) 상품을 선보였다. 12월에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24개의 정육면체 칸 각각에 초콜릿(총 13종 24개)을 담아 일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숫자를 세며 맛보게 했다. 초콜릿을 다 먹은 뒤엔 칸칸이 나뉜 빈 포장박스에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담아둘 수 있다.
 
‘라메종 뒤 쇼콜라’가 여러 제품을 한데 담을 수 있게 만든 햇(hat) 박스.

‘라메종 뒤 쇼콜라’가 여러 제품을 한데 담을 수 있게 만든 햇(hat) 박스.

포장박스 자체가 특정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명하기도 한다. ‘위고에 빅토르’는 이름처럼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프랑스 초콜릿 브랜드다. 미쉐린(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기 사보이(Guy Savoy)’의 총괄 페이스트리 셰프였던 위그 푸제가 론칭한 이 브랜드의 포장박스는 ‘노트북’이라고 불린다. 실제 책상 위에 꽂아두면 장정본 책처럼 보여 다양한 색깔을 시리즈로 수집하는 매니어들이 있다.
 
양장본 책 같은 디자인의 ‘위고에 빅토르’ 초콜릿 박스.
양장본 책 같은 디자인의 ‘위고에 빅토르’ 초콜릿 박스.
포장의 일차 효용은 기능성이다. 그래도 기능성에 ‘트렌디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때문에 디저트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고급 유료 포장은 확대되고 있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 플라워샵 ‘피오리’에선 꽃다발을 장바구니처럼 들고 갈 수 있는 캐리어(5000원)를 개발했다. 안고 가면 손이 자유롭지 못한 불편함을 해소하고 꽃다발을 마치 패션 소품처럼 들고 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방동민 헤드 플로리스트는 “평소에도 남녀 모두 자주 이용하는데, 연말 들어선 선물로 들고 갈 때 쓰려는 손님이 많아 캐리어 구매 비율이 30%나 늘었다”고 말했다.
덴마크 초콜릿 브랜드 ‘라크리스’의 크리스마스 에디션.
덴마크 초콜릿 브랜드 ‘라크리스’의 크리스마스 에디션.
포장은 정성과 격식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는 도산대로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한국 전통 보자기를 무상과 유상 포장 2가지로 서비스한다. 유상 쪽은 고급 비단을 쓰고 별도의 격조 높은 매듭을 더한다. 설화수의 홍보 담당 신한결 과장은 “명절이나 외국인 선물용으로 2만~3만5000원짜리 보자기 포장을 택하는 손님들이 많다”고 했다. 설화수는 웨딩 예단용 혼수보자기 서비스도 하는데 보자기와 예단봉투, 매듭장식 포함 가격이 5만5000원인데도 찾는 고객이 꾸준히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물건은 소비와 함께 닳거나 사라지지만 포장 박스는 남아서 그날의 맛과 멋을 기억하게 해준다. 심지어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포장박스는 그 자체로 중고거래 되기도 한다. 그러니 포장 자체를 허영이나 허례로 몰아붙이는 건 더 이상 무의미하다. 물건의 언패킹(unpacking·포장 벗기기)을 단계별로 소개하고 남는 포장박스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는 ‘인증샷’ 시대, 결국 살아남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게 없는 ‘토털 명품’일지 모른다.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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