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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청문회에 선다면

중앙일보 2016.12.18 18:25 종합 35면 지면보기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최근 갑작스럽게 10여 년 전 금융거래 기록을 찾아야 할 일이 생겼다. 분명 S은행으로 기억하는데 은행에선 “전산상 기록이 없다”며 “우리 은행은 확실히 아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내 기억을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다. 다행히 지난 20여 년치 통장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 덕분에 가까스로 은행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통장을 들이대고 나서야 S은행 측은 구구절절 이유를 댄다. 하여간 컴퓨터로 여러 번 확인했다는 은행은 틀렸고 내 기억이 맞았다.

기억에 얽힌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수납장 정리 중인 부모님과 함께 챙길 것, 버릴 것 분류를 하다가 20여 년 전 오빠가 논산 훈련소 시절 보낸 10여 통의 편지를 발견하고는 온 식구가 깜짝 놀랐다. 수신인은 각각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로 달랐지만 셋 중 아무도 편지 받은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발신인 혼자 편지 쓴 걸 기억했으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도 못 알아볼 정도의 악필인데 정작 편지 글씨체는 거의 여고생급으로 예뻤기 때문이다. 오빠는 “이게 정말 내가 쓴 거냐”고 거꾸로 우리에게 물었다. 정리 중에 편지와 서류 더미 사이에서 사진도 여러 장 발견했다. 거기엔 해외여행 중 찍은 단체사진도 있었다. 같이 찍힌 10여 명이 전부 낯선 이였다. 원래 모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 보면 버젓이 해외여행을 같이 가서 사진까지 찍어놓고는 전부 모르는 사람이라니, 이보다 더 황당할 순 없겠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때론 컴퓨터보다 정확하지만 때론 추억도 소환하지 못할 정도로 불완전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만약 청문회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곤혹스럽겠다는 엉뚱한 상상에 이르렀다. “S은행엔 기록이 없는데 계속 거래를 했다고 우길 거냐”는 질문엔 나중에라도 기록을 제시하면 된다. 하지만 “아들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적 있느냐”거나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혹은 편지를 흔들어대며 “당신 필적도 모르냐”고 하는 순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가 될 게 분명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많은 증인과 참고인들이 모르쇠 부인으로 공분을 샀다. 이화여대 관계자들처럼 교육부 감사 결과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인할 만큼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청문위원들의 준비 안 된 질문과 비상식적 추궁, 그리고 아전인수격 해석 탓에 억울한 사람도 있다. 비상식을 바로잡기 위한 청문회만큼은 상식적으로 진행되는 걸 보고 싶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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