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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인기는 ATM기에서 뽑은 지폐처럼 다시 사라지는 것

중앙선데이 2016.12.18 01:08 510호 8면 지면보기

김경빈 기자



‘연극이 끝난 후’라는 제목의 대중가요가 있다.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은 노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 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중략)로 시작된다. 노래가 시사하듯 1970~80년대는 연극의 시대였다. 연극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으면 이 같은 제목의 대중가요까지 등장했겠는가. 그러나 연극의 시대는 저물었다.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지 않는다. 모두 떠나 버리고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 있다. 뮤지컬이나 영화판의 뜨거움에 비해 차가운 고독만이 흐르고 있다. 연극의 시대는 왜 저물었을까? 40년 무명배우, 그러나 연극계의 대모로 불리는 연극인 예수정(61·사진)에게 한번 답을 물어보자.

(왼쪽부터) 드라마 ‘공항 가는 길’, 연극 ‘과부들’ ‘세일즈맨의 죽음’ ‘나는 너다’. [사진 KBS, 극단 백수광부, 예술의 전당, 돌꽃컴퍼니]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40년 무명, 연극계 대모 예수정

-40년 무명배우란 말이 혹시 거슬리지 않는가.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게는 영광스러운 표현이다. 대학 시절을 포함해 40년 가까이 연극을 해 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영광스럽다. 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해 지금에 이르렀다.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많이 받진 못했지만 40년 가까이 해온 나에게 스스로 상을 줄 만하지 않은가. 40년 무명배우라는 건 나에게는 상찬이다.”



-지나치게 겸손하다. 박정자·손숙씨 못지않게 오랫동안 공연했지만 지명도는 영 말이 아니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나를 알린다는 것은 연극의 본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다. ATM 머신에서 뽑아낸 지폐가 다시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그런 대중성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살아왔다. 단지 연극이 좋아서 지금까지 무대를 사랑해 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무대에서 쓰러지는 그날까지 연극을 하고 싶다.”



-지금의 중년들은 젊은 날 데이트 코스로 연극무대를 곧잘 찾았다. 요즘은 찾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연극은 사람들로 하여금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게 한다. 화려한 영화나 뮤지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장르다. 마치 클래식 문학작품과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악령』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가 쉬운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읽고 나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다. 심쿵이다. 연극이 그렇다. 체질적으로 대중화는 어렵다. 연극의 섣부른 대중화는 오히려 실패하거나 외면받게 되는 위험이 있다. 인생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 보는 게 연극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요즘 연극판에 뛰어드는 젊은 세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 연극 르네상스 시대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BC 4 세기부터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장르가 연극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연극을 해 오셨다. 무엇이 그리 좋던가.



“내가 대학 시절(고려대 독문과 73학번)에는 모든 게 어려웠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주의 시대에 무대에서 맘대로 고함 지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날 선 비판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제한적이나마 맘껏 하고 싶은 말들을 할 수 있어 후련하고 또 행복했다. 주변에 거장이 많았다. 아마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장두이·한태숙 등등 쟁쟁한 선배들과 작업하면서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전율과 에너지를 느꼈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첫 작품이 ‘봄이 오면 산에 들에’였다. 최인훈 선생의 희곡인데 유덕형 선생이 연출했다. 김영동 선생이 음악을, 국수호 선생이 안무를 했으니 그야말로 당대의 최정상에 있는 분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으로 그 무엇을 얻고 또 추구하게 된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쟁쟁한 선배들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셀 수 없이 많이 무대에 섰더라. 무슨 작품이 기억에 남나.



“‘과부들’이라는 작품이다. 얼핏 제목만 보면 외설적인 것 같지만 어두운 작품이다.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이다.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잃은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들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이성열 선생이 연출했다. 그러나 내용은 억압보다는 인간의 소신과 믿음에 관한 얘기다. 끝까지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품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는 전 세계 인류에게 보내는 절규에 가깝다. 모든 것을 빼앗긴 여자가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잘못됐다며 바꾸라는 성화가 당시 대단했다. 이문재 시인은 ‘광장의 어머니들’이란 제목을 지어 보냈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the night)’도 기억에 남는다. 대학 때 이 작품을 하며 많이 울었다. 그때 필이 꽂혀 2000년에는 그동안 번 돈 7000만원을 투자해 직접 제작했다. 요즘 잘나가는 김윤석·주진모씨와 함께 무대에 섰다. 물론 한 푼도 못 건졌다. 내가 주인공인 메리역을 맡았다. 7000만원 몽땅 까먹었다고 주위의 걱정이 대단했다. 하지만 몇 백 배의 소중한 가치가 보석처럼 지금도 내 맘에 반짝이고 있다. 사실 까먹었다는 말은 내게는 모욕이다. 원 없이 공연했다.”



-요즘 들어 부쩍 외도가 잦다. ‘공항 가는 길’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등등 TV 드라마에도 등장하고 ‘터널’ ‘부산행’ 등 영화에도 출연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돈이 필요했다. 무대에 계속 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외도했다. 그런데 외도해 보니 좋은 점이 있더라. 예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연은 주연을 부각시키는, 그야말로 부수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젠 조연에도 부피감이 커지고 무게감이 더해졌다. 조연에 오히려 의미를 찾는 관객이 있을 만큼 한국 드라마·영화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감독들도 이젠 조연부터 꼼꼼히 챙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조연이 주는 즐거움을 쏠쏠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연극인이고 나의 정체성은 무대에 있다. 달라진 것은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연극인이 아니라 가끔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 배우로 알아주는 게 씁쓸하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



-가족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故) 정애란 여사부터 탤런트 한진희씨까지….



“어머니는 아주 호탕한 분이었다. 사람들은 예수정의 어머니 정애란보다 ‘전원일기’ 김 회장(최불암 역)의 어머니로 알고 있다. 젊어서부터 할머니역만 하셨다. 어머니 얼굴을 떠올려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어디 한구석에도 요염한 끼나 교태가 없다. 그래서 일평생 할머니역만 하시다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타고난 연기자다. 분장실에서 나에게 젖을 먹이다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오르곤 하셨다고 한다. 그 기억들이 무의식 중에 나를 연극인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탤런트 한진희가 형부다. 바로 위 수옥 언니의 남편이다. 언니는 TBC 공채 탤런트인데 결혼하고 연기활동을 접었다. 형부가 살림만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평생 주부로 살고 있다. 형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술만 마시고 엄청 무뚝뚝하다. 그러나 자기 관리 하나는 끝내 준다. 매일 서너 시간 운동하고 연기를 위해 성악 발성 연습에 판소리까지, 그야말로 프로다운 면이 있다. 낮은 중저음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수정의 본명은 김수정이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수송초등학교, 숭의여중·고를 거쳐 고려대를 졸업한 후 독일 뮌헨대에서 연극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세일즈맨의 죽음’과 ‘하나코’ ‘과부들’ ‘바다와 양산’ ‘신의 아그네스’ 등 숱한 무대에 올랐다. 서울연극제 연기상, 히서연극상, 동아연극상 등을 받았다. 최근 들어 영화 ‘부산행’에서 인길 할머니, ‘터널’에서 아들(정석용)을 잃은 어머니,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 서도우(이상윤)의 어머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의 현우(이선균) 어머니역 등에 출연했다.



예수정에게는 평생 무대에서 살아온, 뼛속까지 연극인이라는 강렬한 기개가 무럭무럭 피어 나온다.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마음은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있는데 시간은 어김없이 한 해 맨 끝자락에 야멸차게 세워 두고 있다. 미련과 안타까움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이제 이 한 해를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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