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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위해 울려퍼져야 할 곡

중앙선데이 2016.12.18 00:28 510호 27면 지면보기

아론 코플랜드 관현악 음반. 일본 출신 에이지 오우에가 지휘했다.



“나,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WITH 樂] 아론 코플랜드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르’

오래전 군인 출신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지금은 수백만의 촛불로 타오르는 광화문 앞이지만 그 해 겨울은 탱크와 박격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몇몇 군인들이 12·12 내란을 일으켰다. 당시 주역이었던 노태우 소장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청와대를 접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이끌어낸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보통사람’이며,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며 표를 호소했다.



하극상을 일으키고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했던 이가 위대한 보통사람을 말했던 셈이다. 다행히 역사의 진실은 드러났고, 쿠데타와 비리를 저지른 전직 대통령은 푸른 집을 나와 푸른 옷을 입었다.



클래식에도 보통 사람을 전면에 내세운 곡이 있다. 미국의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가 평범한 사람들을 소재로 해서 만든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라는 곡이다. 올림픽이나 커다란 행사에도 많이 사용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빠레’다.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랜 기간 이 곡이 클래식 음악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처음 이 곡을 들었던 것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그즈음 락밴드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이하 ELP) 의 연주를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연주한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르’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처음 도입부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끼게 만드는 키스 에머슨의 신디사이저와 박력 있는 칼 파머의 드럼연주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별로였다. 라디오에서 종종 나오던 ‘세라비’ 를 부르던 그렉 레이크의 멋진 보컬도 없었다. 곡 후반부는 재즈를 연상시키는 즉흥연주만 잔뜩 있었다. 당시 중학생 소년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했다. ELP라는 밴드가 코플랜드뿐 아니라 무소륵스키, 히나스테라의 곡들을 재해석하여 연주한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미국 음악가들의 교장선생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론 코플랜드는 미국 작곡가답게 재즈나 민속리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유럽에서 배운 클래식을 미국적 토양에서 키워내고 싶었던 바람과 이를 다문화 다인종 사회인 미국의 대중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각기 다른 민족과 다른 인종들이 모여 사는 미국 사회에서 국가적 통합은 차이를 뛰어 넘는 보편적 용어가 필요했다. 자유나 평등 또는 민주주의 같은 가치들 말이다.



한편으로는 전쟁 같은 것도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는 원래 2차 대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키워낸 유진 구센스가 미국 신시내티에 있던 시절 위촉한 곡이다. 지휘자는 공연 서곡용으로 여러 명의 작곡가에게 팡파르를 의뢰했다. 목록을 보면 공군을 위한 팡파르, 참전 의료진을 위한 팡파르 같은 곡들이 18개 정도가 있다. 그런데 오직 코플랜드의 것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는 시작부터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긴다. 강력한 팀파니와 큰 북의 연타로 팡파르가 시작된다. 망치로 대지를 때리듯, 거인이 새로운 세기에 첫발을 내딛듯 말이다. 타악기들의 울림이 주변을 환기시킨다. 곧 이어 숨죽은 듯 조용해진다. 그리고 천천히 안개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듯 4대의 트럼펫이 장중한 멜로디를 연주한다. 품위를 잃지 않는 경건한 트럼펫 소리에 이어 다시 북소리가 둥둥둥 신호를 보내면 다른 악기들이 등장한다. 호른이 함께 길을 나서겠다며 트럼펫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뒷줄에 트롬본이 어깨에 손을 얹고 튜바가 걸음을 맞춘다. 같은 멜로디가 한번 씩 반복될 때마다 하나씩 둘씩 금관이 더해져서 짧지만 거대한 축가가 완성된다.



애초에 코플랜드는 이 곡의 제목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팡파르’ 같은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종 제목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르’가 되었다. 민주주의의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교 선생님, 무명의 예술가 등등. 올해 우리 사회는 이들이 손을 맞잡으며 탱크가 서있던 광장을 촛불의 팡파르로 가득 채우는 걸 보았다. 2016년 최고의 황금빛 팡파르는 그들, 위대한 보통사람들을 위해 울려 퍼져야만 한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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