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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곱게 나이 드는, 벽돌집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2016.12.16 01:27 종합 22면 지면보기
검은 전벽돌과 붉은 고벽돌을 쌓아서 색과 질감을 달리한 서울 명륜동 도천 라일락집. [사진 박영채 작가]

검은 전벽돌과 붉은 고벽돌을 쌓아서 색과 질감을 달리한 서울 명륜동 도천 라일락집. [사진 박영채 작가]

서울 성균관대와 창덕궁 사이 길 모퉁이에 지난해 자리 잡은 집 한 채는 유독 주변 풍경을 닮았다. 새 집인데도 튀지 않는다. 원래 있었던 듯 동네에 스며들었다. 고(故) 도상봉 화백의 기념관이자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천 라일락집’이다. 일반주택으로 드물게 서울시 건축상 대상(2015년)을 수상했다. 주요 수상 사유 중 하나가 ‘주변 풍경에 대한 배려’였다.

인기 시들 20여년 만에 제2 전성기
노출 콘크리트, 금속 패널 신소재
시간 흐르면서 얼룩지고 더러워져
따뜻한 느낌 벽돌 다시 주목받아
쌓는 방식 따라 곡선 등 색다른 연출
고벽돌, 시멘트 벽돌…종류 다양해
판교 전원주택서도 벽돌집이 대세

‘도천 라일락집’은 벽돌집이다. 성균관대와 창덕궁 돌담 기와를 닮은 검은색 벽돌과 주변 다세대 건물의 색을 닮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집을 설계한 정재헌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는 동네를 보자마자 새 집의 건축 재료를 벽돌로 정했다. 정 교수는 “벽돌집은 작은 픽셀(벽돌)이 쌓여 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림의 기법으로 비유하면 점묘화라 할 수 있다”며 “형태가 강하게 드러나기보다 원래 있었던 건물처럼 편안해 보이게 한다”고 설명했다.

‘도천 라일락집’뿐 아니다. 최신 주택 트렌드를 살필 수 있는 판교 전원주택 단지도 한 땀 한 땀 쌓는 벽돌집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신축 건물의 절반 이상이 벽돌집이다.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요즘 벽돌집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최근 판교에 자신의 살림집도 벽돌로 지은 김창균 유타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요즘 찾아오는 건축주들의 절반 이상이 벽돌로 집을 짓길 원한다”며 “건축자재 중 하위 30%의 가격으로 상위 80~90%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게 벽돌”이라고 말했다.

사실 벽돌집은 새롭지 않다. 인류 주거사에서 벽돌의 역사는 오래됐다. 흙과 불만 있으면 구워낼 수 있는 벽돌은 묵직한 돌보다 다루기 쉬워 대중적인 소재로 꼽혔다. 한국 현대건축사에 큰 획을 그은 건축가 김수근도 벽돌을 즐겨 썼다. 그는 생전에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했다. 대학로 마로니에 일대의 붉은 벽돌 건축물과 어우러지는 샘터 사옥, 지금은 아라리오 미술관이 돼 버린 원서동 공간 사옥, 장충동 경동교회 등 여전히 수작으로 꼽히는 벽돌 건축물이 그의 작품이다. 모두 1970~80년대 완공됐다.

벽돌의 인기는 90년대 들어 급격히 시들해졌다. 노출 콘크리트, 금속 패널 등 새로운 건축 소재가 인기를 끌면서다. 게다가 이 무렵 다세대·다가구 주택 시장에서 벽돌이 마구잡이로 쓰이면서 ‘벽돌집=싸구려’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됐다. 그런데도 벽돌이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건축가들은 벽돌의 ‘시간성’과 ‘응용 가능성’에 주목했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은 20여 년이 지나니 외관이 지저분해졌다. 공기 질도 좋지 않고 습한 서울 날씨 탓이다. 금속 패널도 얼룩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학로의 옛 벽돌 건물은 여전하다. 한 재료의 생애주기를 따졌을 때 벽돌은 나이를 먹어도 주름살이 예쁘게 지는 재료라는 것을 알게 됐다.”(장영철 와이즈건축 소장)

“벽돌의 실용성에 더해 미적인 측면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다. 다양하게 쌓는 방식을 통해서다. 철골·콘크리트·유리 같은 재료와 달리 벽돌이 주는 따뜻한 느낌과 여러 실험이 더해져 신진 건축가들 사이에서 벽돌을 다시 쓰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소장)
서울 궁정동의 상가주택 ‘더 웨스트 빌리지’. 수원성을 쌓을 때 썼던 ‘영롱쌓기’ 기법을 현대식 건물에 적용했다. [사진 박영채 작가]

서울 궁정동의 상가주택 ‘더 웨스트 빌리지’. 수원성을 쌓을 때 썼던 ‘영롱쌓기’ 기법을 현대식 건물에 적용했다. [사진 박영채 작가]

2011년 완공된 서울 궁정동의 상가주택 ‘더 웨스트 빌리지’는 벽돌 건축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쌓는 방식을 달리하면서다. 황 소장 작품인 건물의 뒤편 유리창 앞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벽돌 벽이 한 겹 덧대어져 있다. 수원성곽을 쌓을 때도 쓰였다는 ‘영롱쌓기’ 방식을 현대 건물에 응용했다. 마주보고 있는 건물로부터의 시선을 일부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다공성(多孔性)’벽인데 구멍 사이로 비치는 빛과 벽돌이 어우러져 벽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나다. 건축가는 “벽돌 벽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적절히 차단하는 한옥 처마 역할을 하면서 건물이 밀집돼 있는 도시에서 프라이버시를 적절히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이름을 새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돌. 위쪽은 건물 전경. [사진 김두호 작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 이름을 새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돌. 위쪽은 건물 전경. [사진 김두호 작가]

서울 성산동 성미산 기슭에 자리 잡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검은색 전벽돌로 지어졌다. 전벽돌은 굴뚝 없는 가마에 구워 불연소된 탄소가 표면에 내려앉아 검은색을 띠는 벽돌이다. 박물관은 와이즈건축의 장영철·전숙희 소장 작품으로 2012년 서울시 건축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4만5000장의 벽돌로 쌓아 올린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2층 테라스에 설치된 다공성벽이다. 보통 벽돌을 쌓을 때 벽돌 사이에 시멘트와 물을 섞은 모르타르를 발라 고정하는 것과 달리 이 벽은 모르타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쌓은 벽돌 구멍에 볼트를 넣고 너트로 죄어 고정시켰다. 일명 ‘건식 쌓기’ 기법이다. 장 소장은 “벽돌 사이에 모르타르를 발라 쌓으면 뒤 벽면이 지저분해지고 비가 오면 시멘트 가루와 물이 반응해 벽돌에 하얗게 ‘백화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건식으로 쌓는 기법을 생각해냈다”고 설명했다.
벽돌을 휘어지듯 쌓아 지은 파주 출판단지 뮤엠교육 사옥. 입구가 마치 커튼을 열어젖힌 듯하다. 벽돌집은 쌓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띤다. [사진 노경 작가]

벽돌을 휘어지듯 쌓아 지은 파주 출판단지 뮤엠교육 사옥. 입구가 마치 커튼을 열어젖힌 듯하다. 벽돌집은 쌓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띤다. [사진 노경 작가]

벽돌 건축의 질은 고르게 잘 쌓은 벽돌에서 나온다. 쌓는 방식을 놓고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들어선 뮤엠교육사옥의 경우 입구가 마치 커튼을 열어젖힌 모양으로 휘듯 열려 있다. 벽돌로 쌓아 만든 곡선 면이다. 장 소장은 “쌓기에 따라 곡선을 포함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벽돌의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흙을 구워 만든 점토 벽돌뿐 아니라 고벽돌, 시멘트 벽돌 등 기존에 쓰지 않던 다양한 벽돌을 활용하는 것도 트렌드다. 고벽돌은 주로 중국·러시아 등에서 수입해 쓴다. 세월의 때가 묻은 빈티지한 느낌 덕에 인기다. 김창균 소장은 “오래된 건물을 부쉈을 때 나온 벽돌까지 재활용해 쓸 수 있을 정도로 벽돌은 견고하면서 친환경적인 재료”라고 설명했다.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시멘트 벽돌로 지은 전남 담양의 숙박시설 호시담. [사진 박영채 작가]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시멘트 벽돌로 지은 전남 담양의 숙박시설 호시담. [사진 박영채 작가]

집의 내벽을 쌓을 때만 쓰던 시멘트 벽돌로 아예 집 전체를 짓는 시도를 한 곳도 있다. 전남 담양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숙박시설 호시담은 시멘트 벽돌로 지었다. 시멘트 벽돌에 칠도 하지 않아 완공된 후에도 ‘공사 중’이라고 오해받기도 했다. 호시담을 설계한 정재헌 교수는 “자연이 더 도드라지게 보이게 하고 싶어 무채색의 시멘트 벽돌로 단층 건물을 지었다”며 “벽돌은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내기에 디테일을 세세하게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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