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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우울한 당신 ‘왕년의 나’를 찾고 싶나요

중앙일보 2016.12.14 00:01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정수씨는 언제부터인가 같은 말을 자꾸만 되뇐다. ‘나를 찾고 싶다.’ 생각해 보면 너무 오래 남의 시선에 맞춰서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말하고 싶은 것을 삼키며 살아온 시절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모습은 스스로가 바라는 나는 아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얼굴은 그저 가면일 뿐. 정수씨는 이제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

마음이 허해지면 과거에 집착하기 시작
자아는 되찾는 것이 아닌 확장해 가는 것
되고 싶은 모습 정하고 생활 방식 바꿔야

정수씨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공허감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애써 온 생존의 시간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행운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어도 손에 쥔 것은 얼마 없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지 않다. 술자리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주정은 모두 한결같다. 처음엔 호기롭지만 곧 허무하다. 자랑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으니 다들 자랑을 한다. 하지만 이어질 말은 얼마 없기에 다들 외친다. ‘마셔! 사는 게 다 거지 같은 거지.’ 분명 내일 아침은 술이 덜 깬 채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럴 때면 자꾸만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기찻길에 선 설경구가 양손을 번쩍 들고 외쳤지. “나 돌아갈래!”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벌써 오래지만 계속 같은 자리다. 돌아가지지 않는다. 용기가 없어서일까? 의지가 약해서일까?

적잖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삶이란 자신의 참모습에 충실한 삶이다. 지금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끼는 이유는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자기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자아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을 열다섯 언저리의 풋풋한 모습일까? 어른으로서의 삶을 막 시작하던 스무 살 때의 모습일까? 아니면 처음 직업을 갖고 세상과 부딪히던 패기만만한 직장 초년병 시절이 진정한 내 모습일까?

이것일까 저것일까 고민을 해보지만 실은 그때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의 모습을 그려낸다고 해도 정말 그 당시의 내가 그랬는지 알 수도 없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떠올린 과거란 현재라는 필터로 채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고, 미래의 나는 또 다를 것이다. 그중 어느 모습이 ‘진정한 나’인지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정수씨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또 오염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스스로가 혐오스럽다는 점이다.

그렇다. 정수씨는 지금의 자신이 싫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싫어하면 살아가기가 어렵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죽음에 다가간다. 싫은 것,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을 안고 어찌 계속 걸어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자신을 좋아하던지 아니면 삶을 끝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끝내기 위해 누군가는 진탕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잠만 자려 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에게 벌을 주듯 위험한 행동을 반복한다. 의사들은 이런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우울증이 오기 전 타협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현재의 자신은 싫지만 과거의 자신, 오염되기 전의 진정한 자아는 좋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을 완전히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싫지 않다. 다만 오염되었을 뿐이야. 오염된 나를 정화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정수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슬아슬한 두뇌 속 타협에 성공했다. 그 덕에 오늘도 열심히 찾고 있다. 어느 곳에도,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진정한 자신을 찾고 있다. 책을 보고, 명상을 하고, 명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누구인지 묻고 또 묻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정한 나는 지금의 나다. 지금의 내 안에는 과거의 내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굴곡, 그 굴곡마다 내가 했던 선택들, 삶을 유지하는 작은 습관과 무의식적으로 내리곤 하는 판단의 기제까지 지금의 나는 다 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영원불멸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나는 미래로 움직이고, 현재는 과거로 사라진다. 나는 매 순간 새로운 현재의 ‘나’가 되고 있다.

진정한 나를 찾는 사람은 종종 과거에 집착하고 순수함에 집착한다. 순수함도 초심도 나쁘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많은 경우 단순하다. 지혜란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잃어버렸던 과거의 나를 되찾는 것일까? 아니다. 과거의 초심과 내가 다시 돌아간 초심은 결코 같지 않다. 많은 경험이 나를 통과했고 그 경험이 가르쳐준 지혜도, 상처도 내게 남아있다. 그 지혜와 상처가 지금 나의 선택을 낳고 있다. 초심은 되찾는 것이 아니다. 세월을 통해 그 의미를 더 깊게 깨닫고 다시 선택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다 끌어안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엄밀히 과거를 돌아보면 누구나 알게 된다. 초심 역시 한 가지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도 여러 개의 초심이 있다. 그 초심 중 하나를 현재의 내가 선택할 뿐이다.
 
『예술 애호가들』 만화 강국 벨기에의 떠오르는 신예 브레흐트 에번스의 작품. 선이 없는 수채화, 과감한 색감, 제약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칸 나누기 등 전형적인 만화 문법을 파괴해온 젊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계와 인간의 오만에 대해 풍자한다. 옆의 삽화는 이 책의 한 장면이다.

『예술 애호가들』
만화 강국 벨기에의 떠오르는 신예 브레흐트 에번스의 작품. 선이 없는 수채화, 과감한 색감, 제약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칸 나누기 등 전형적인 만화 문법을 파괴해온 젊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계와 인간의 오만에 대해 풍자한다. 옆의 삽화는 이 책의 한 장면이다.

정수씨는 오늘도 과거를 돌아보며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 스스로를 과거의 어느 시점에 묶어둘 필요는 없다. 자아는 되찾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내 안에 들여올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다른 환경에서 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다르게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

정수씨가 아직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서 답답해하며 삶에 갈증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가 변하고 싶은 모습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해서다. 물론 그것을 다른 누가 결정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다. 결정하고, 그다음에 또 결정해도 좋다. 좋은 쪽이 있다면 조금 변하고, 다음에 또 좋은 선택을 해도 좋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겁먹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삶은 수명이 허락하는 한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그저 내 선택을 사랑하고, 또 선택하면 그만이다. 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서천석은
서천석은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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