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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4. 미묘 - 누군가, 주머니 속 (4)

중앙일보 2016.12.14 00:01
묘는 미의 허벅지 밑을 만졌다.
미의 말대로 정말 다리는 무릎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손에 온통 진득한 것들이 묻어났다. 묘는 점퍼에 손바닥을 닦으며 주저앉았다. 차가운 기온 속에서도 비릿한 피 냄새가 목구멍까지 파고들었다. 고요한 허공 속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묘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랬다.
얼어붙은 호수와 사방의 구멍과 죽은 자들과 짐승처럼 울어대는 바람과 두 다리가 잘린 기우뚱한 미와 눈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자신과, 어디선가 날아들지 모르는 미가 말한 부메랑 칼날과. 구멍 속에서 물의 흐름 사이로 떨어져 나가던 초로의 남자. 그의 황망하게 스러지던 눈동자 같은 것들. 묘는 초로의 남자가 지나치게 빨리 걸었다 여긴다. 두발이 이끄는 속도를 아무 의심 없이 믿어서였겠지. 속도에서 비롯되는 파동들을 감당하지 못해서였겠지. 우리는 늘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
생각은 묘를 향해 빛의 파편들처럼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유성의 꼬리와도 같아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미와 묘인 자신이 왜 호수를 건너려 했는지.
그러나 미에게 묻지 않았다. 호수를 건너자 했던 것은 묘였고, 미는 그를 따라나섰다. 끝내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이 막막하고 알 수 없는 호수를 건너려 했던 이유를.
 
묘는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미가 묘의 얼굴에 온통 피가 묻었다며 웃었다. 달빛 아래 묘의 얼굴이 한결 선명하게 보인다 말하면서도 계속 웃었다. 묘는 미의 웃음이 불안한 기운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묘는 미가 애써 구해온 외투나 점퍼 따위들을 더 껴입었다.
엎드린 미를 일으켜 앉혔다. 미가 묘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살아야지. 어떻게든 살아 호수를 건너야지.”
 

묘가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손으로 더듬거리며 미의 눈물을 닦은 후 옷을 더 껴 입혔다.
 
“아주 끝장내버릴 작정이냐.”
 
묘가 머플러로 얼굴을 모두 감싸버리자 미가 말했다.
 
“미안.”
 
묘의 대답에 미가 또 웃었다. 묘도 조금 웃었다.
묘는 다시 더듬거리며 옷가지들을 엮어 길게 썰매를 만들었다.
미를 안아 위에 누이고 단단히 묶었다. 손이 굽어 매듭이 몇 번 풀렸지만 묘는 침착하게 그 일을 다시 했다. 마침내 썰매 끝으로 낸 긴 끈을 자신의 허리에 묶을 수 있었다. 수레를 끌듯 허리에 묶은 끈을 양손으로 잡고 끌기 시작했다. 눈앞은 온통 깜깜한 어둠이었지만 미의 눈이 있으니 괜찮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얼마 가지 않아 옷을 엮어 만든 썰매가 가벼워지자 묘는 미를 찾아 바닥을 더듬었다. 미는 조금 떨어진 얼음판에 밀려나 있었다. 묘는 썰매였던 옷가지들을 다시 풀어 미의 몸을 둥그렇게 감싸기 시작했다. 미는 자꾸 웃었지만, 묘는 더 이상 그런 미가 바보 같지 않았다. 옷으로 둥그렇게 감싼 미를 들쳐 업었다. 몇 겹으로 띠를 두르듯 자신의 몸에 옷을 묶었다. 기우뚱 몸이 기울었다. 묘는 미의 잘린 다리를 꽉 그러잡았다.
걷는 내내 미와 묘는 말이 없었다.
묘의 가쁜 숨이 하얀 입김으로 퍼져나가는 걸 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묘가 계속 한쪽으로만 치우쳐 걷자 오른쪽으로 조금만, 하며 방향을 잡을 때만 입을 열었다.
 
“지랄 같네.”
 
묘의 등 뒤에서 미가 말했다.
 
“지랄 같다.”
 
묘가 대답했다. 그리고 걸었다. 오직 걷는 것밖에 모른다는 자세로 끝도 없는 얼음판 위를 계속 걸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아무런 말이 없어진 미가 마음에 걸렸지만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겨워 묘도 입을 다물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기묘한 세계에 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얼어붙은 호수 위의 길은 어디와도 이어져 있지 않고, 이 여정에 끝은 없고,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끝에 잔뜩 힘을 주어서인지 다리가 뻐근했다.
점점 걸음이 느려졌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묘는 잠시 몸을 구부려 등에 업은 미를 추어올렸다. 묵직한 돌덩이 같은 무게가 어깨 쪽으로 밀려왔다. 한 번 더 추어올리자 묘의 목에 팔을 감은 미가 헉, 하고 딸꾹질 소리를 냈다.
 
“이렇게 계속 가면 된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단 한 번도 둘인 적은 없었다.”
 
졸린 목소리의 미가 등 위에서 말했다. 보이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었다. 묘는 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끄덕였다.
걷는 내내 걸음을 멈추고 한 번씩 미를 추어올렸다. 헉, 하는 딸꾹질 같은 소리를 내며 미는 묘의 등 뒤에 있었다. 헉, 헉, 하며 미는 묘의 곁에 언제나 있었다. 다시 미를 추어올렸고, 헉 하고 미가 딸꾹질 소리를 내는 동시에 묘의 등이 조금 가벼워졌다.
묘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미는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분명 미가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묘의 생각에 미는 묘의 등속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미가 안으로 한 줌씩 스며들 때마다 몸의 모든 것들이 꿈틀거렸다. 수많은 세포들이 혓바닥의 오돌토돌하게 돋아난 미뢰처럼 날름거리며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휘돌았다. 흐름의 결이 느껴질 정도로 움직임은 섬세했고 조금씩 몸이 따뜻해졌다.
 
묘는 이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미가 안으로 완전히 스며들자 다리에 힘이 실렸다. 미의 심장이 묘의 심장에 포개졌다. 깜빡거리는 미의 붉은 박동이 묘 안에서 플래시처럼 반짝였다. 미가 지나온 시간의 여정들을 묘는 모두 읽어냈다. 그러므로 등이 완전하게 가벼워지는 순간에도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눈앞으로 뿌연 눈보라가 회오리로 일었다. 그것은 미의 눈으로 보는 풍경이었다. 눈보라의 세계는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묘는 눈보라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남자는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중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분명 다른 누군가와 이 얼음의 길을 걸으려 했다는 느낌으로 혼란스러웠다. 미묘하고도 따뜻한 기운이 등 쪽으로부터 전해졌지만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걸으며 자신의 허리에 묶인 옷가지들을 풀었다. 이런 걸 왜 무겁게 허리에 감았던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묘는 손바닥에 진득하게 묻은 붉은 물기들을 옷가지에 닦아낸 다음 얼음의 길 위에 버렸다.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쓰윽, 기다란 손이 오른쪽 주머니 속으로 스며들듯 들어왔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남자의 점퍼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 걷고 있었다.
이상하지.
분명 모르는 여자인데도 거부감이 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는 여자의 눈이 익숙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여자의 손을 내버려 두었다. 남자와 여자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걷는 동안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찌른 여자에게로 남자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남자가 그렇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의 손이 왼쪽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번에는 온통 검은빛을 띤 형체였다. 남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자신의 몸에서 분화(分化)되는 일들. 얼마든지. 이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라면 얼마든지. 이제 남자는 그러므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검은 형체의 손 덕분에 남자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걸었다.
그는 양쪽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은 여자와 그림자 같은 검은 형체와 함께 걷는 일에만 열중했다. 잠잠해진 눈과 바람을 틈타 푸른 달빛이 퍼져나갔다. 얼음판 위로 똑같이 생긴 그림자 세 개가 드리워졌다.
 
“이쪽으로 조금만.”
 
여자가 하아, 입김을 뱉어내며 오른쪽으로 남자를 끌었다.
여자 말대로 약간 방향을 튼 남자가 왼쪽에 선 검은 형체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검은 형체도 남자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남자는 그들과 나란히 걸었다. 걷다가 양쪽의 그들이 주머니 속으로 스며들어온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새어 나온 것일지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남자는 점점 확신했다.
곳곳에 사방으로 뚫린 구멍과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무릎을 꺾은 채 죽은 자들이 보였다. 단단하게 얼어 더 미끄러운 얼음판에서 한 번씩 기우뚱 기울었지만, 남자는 계속 걸었다. 바람이 호수의 얼음 위를 훑어가며 긴 울음소리를 냈다.
남자는 이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양쪽을 보니 주머니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자신들이 서 있었다. 얼음판에 드리운 그림자는 모두 셋이었다.
 
누구나 이렇게 살얼음판 같은 낯선 이야기 속으로 이유 없이 내던져지는 거야.
남자는 생각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오로지 달빛 아래 얼음호수를 건너는 일, 지금은 그것이 다였고 모든 것이었다.
  
- ‘미묘’ 끝.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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