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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앙시앵 레짐 혹은 ‘이게 나라냐’

중앙일보 2016.12.13 00:43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건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이건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타미노 왕자는 숲속에서 괴물에게 쫓겨 죽을 뻔하다가 밤의 여왕이 보낸 시녀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시녀들은 깨어난 왕자에게 밤의 여왕의 딸 파미나 공주의 초상을 보여준다. 타미노는 한눈에 공주에게 반한다. 이어 밤의 여왕이 천둥번개와 함께 나타나 호소한다. “악당 자라스트로가 내 딸을 빼앗아 갔다오. 부디 파미나를 구해주오. 그러면 그대와 결혼시켜 주겠소.” 타미노는 굳게 약속하고 숲에서 만난 새장수 파파게노와 함께 자라스트로의 성을 향해 떠난다.

오페라 ‘마술피리’ 주제는 거짓·탐욕의 구체제 탈피
이성의 지배 새 나라 온다면 ‘정의’의 현판 걸려야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동화 스토리여서 그 결말이 뻔해 보인다. “왕자는 자라스트로의 성에서 온갖 난관을 만나지만 모두 극복하고 악한 괴물을 퇴치한다. 그리고 공주를 구해내 행복한 결합을 한다.”

그런데 이 오페라의 후반은 딴판이다. 타미노가 성에 도착해 보니 세 개의 사원이 있다. 이성, 지혜, 자연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지혜의 사원에서 만난 한 현자가 타미노에게 말한다. “자라스트로는 그런 괴물이 아니오. 당신이야말로 사랑과 진실을 찾는다면서 마음에는 죽음과 복수가 가득하군요.” 돌연한 선과 악의 뒤바뀜에 타미노는 당황한다.

안에 들어가 보니 과연 자라스트로는 현자 중의 현자로 존경을 받는 지도자이다. 오히려 밤의 여왕이 악한 존재이다. 파미나는 유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어머니로부터 보호받는 중이다. 타미노를 보자 자라스트로는 파미나를 만나게 해주지만 둘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좀 더 성숙이 필요하다면서 그들을 훈련 과정으로 보낸다. 이를 알고 밤의 여왕은 더욱 분노하여 몰래 딸에게 나타나 칼을 주면서 말한다. “네가 자라스트로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넌 내 딸이 아니다”(화려한 ‘밤의 여왕의 아리아’인데 알고 보면 기득권을 지키노라 악에 받친 늙은 여인의 노래이다). 그도 통하지 않자 여왕은 손수 공격에 나서지만 결국 자라스트로가 펼치는 이성과 박애의 기운 앞에서 힘을 잃고 자멸한다. 훈련으로 거듭난 타미노와 파미나는 지혜의 사원에 받아들여지고 모두 자라스트로를 찬양하면서 막이 내린다.

후반부는 동화라기보다 어설픈 교훈극이다. 이렇듯 뒤죽박죽인 스토리와 전후가 맞지 않는 전개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이 오페라가 태어난 시대의 맥락에서 읽으면 쉽게 뜻이 통한다. 이 오페라는 1791년에 쓰여졌다. 프랑스혁명(1789년) 직후다. 앙시앵 레짐(왕권, 교회, 귀족사회 등의 구체제)에 대한 거부가 폭발하고 있을 때였다. 계몽을 통해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꿈에 부푼 시대였다. <마술피리>에 왜 피라미드가 나오는지, 자라스트로가 왜 기독교가 아닌 이집트 신 이지스를 숭배하는 현자인지, 왕자와 공주 이야기에 왜 서민 커플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등장하는지가 모두 이와 관련된다. 세 개의 문에 붙여진 명패도 이해되고 왕자와 공주에게 훈련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설명된다. <마술피리>의 주제는 분명하다. “앙시앵 레짐으로부터 이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나라로”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가 가슴을 친다. 그렇다. 이 몰염치한 거짓과 탐욕, 만연한 요령과 눈치, 온갖 탈법과 불공정이 판치는 곳을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개탄도 했었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면서 희망도 가졌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흙탕물은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실은 이 나라도 힘들게 만들었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려가며, 고문을 받아가며, 금반지를 빼다 팔아가며…. 한때는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에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사람들이 촛불을 든다. 촛불을 들고 새로운 나라를 찾아 길을 떠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촛불 끄기 퍼포먼스’를 하면서. 빛의 쓰나미를 만들면서.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애써 웃으며 국화꽃을 던지면서.

새 나라가 온다면 그 사원의 현판 중 하나는 “정의”였으면 좋겠다. 그것 없이는 경제도 발전도 성과도 경쟁도 망가진다는 것을 똑똑히 배웠으므로. 어쩌면 이번 국정 농단 사태는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혹독한 훈련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이건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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