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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개인이 행복한 사회

중앙일보 2016.12.09 18:47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연말이라 일하는 사무실의 대표변호사와 업무 범위 조정에 관해 상의했다. 대화 도중 사무실에서 나한테 바라는 것이 뭐냐고 했더니 우리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개인으로서 행복하고 사무실의 구성원으로서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긴 한다. 영국에서 행복하다(happy)란 형용사는 전반적으로 괜찮으냐고 가볍게 물어볼 때도 쓰고 만족한다는 의미로 쓰기도 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나에게 좋고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의미 정도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
대통령은 사적 인연 끊겠다고?
오히려 사적 영역 존중이 필요
사회 위해 모든 걸 희생하기보다
개인의 행복 중요하다고 여겨야


사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직장이라면 다 그렇듯이 뭐 그다지 사정 봐주면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이 일을 하는 건 그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상식인 거다.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는 것. 사실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말이라니 말인데 여기서 일을 하면서 아이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거나 몸이 아프니까 출근할 수 없다는 데 대고 이래서 애 딸린 여자는 제대로 일을 못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고 쉬다니 정신상태가 틀려먹었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없다. 이것은 이 사회의 상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으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라며 금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거기에 덧붙여진 것은 ‘라면의 상식화’다. (청와대는) 명예를 먹는 곳이며 어떤 즐거움도 없고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지난 8월 사망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수첩에 적힌 청와대의 업무 지침이다. 이렇게 업무를 수행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것이 도무지 상식적인 업무 지침으로 보이지 않을뿐더러 저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이런 업무 지침에 따른 생활이 가능하다고 치고, 그러니까 밤을 낮 삼아 일하고 주말도 평일처럼 일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참을 수 없이 지루하고 행복한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회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만 하고 놀지 않는 사람은 멍청해지는 것이다(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가정이 초토화될 것은 주문할 것도 없이 불문가지다.

다만 한때 우리 사회는 이런 식의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문득 그 사고방식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보고 있는 몇 십 년은 뒤로 훌쩍 후퇴한 사회다.

국가를 포함해 모든 조직은 그 수장의 사고방식과 태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 업무 지침에서 보듯이 청와대는 마치 모든 개인의 사생활이란 없는 듯이 굴었다. “계시는 곳이 집무실”이고 “일어나면 출근이며 주무시면 퇴근”이라고 했다. 물론 개인을 희생해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주장의 원래 의도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태도의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주간의 야간화’ 및 ‘업무의 휴식화’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세월호 7시간’ 의혹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진 국정 농단 정국은 이와 같은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하는 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결국 대통령 및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공적인 부분과 구별되어야만 하는 개인적 부분을 없는 것으로 무시한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하는 일은 뭐든 공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적인 인연을 공적인 부분에 끌어다 써버렸다. 공적이어야 할 업무를 사적인 영역과 혼동한 것이다. 사생활이 없는 자들이 공적인 일을 사생활로 만들어 버리고는 엉뚱한 부분에서 사생활을 주장했다고 해야 하나.

나는 대통령이 국정 농단에 대한 사과를 하며 모든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꽤 절망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사적인 영역의 존중이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고 사적인 부분을 존중할 때 비로소 공적인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는 국가를 위해 개인적인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사람은 아니다. 차라리 개인으로서도 마음껏 행복한 삶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자신이 행복한 만큼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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