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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한국 맥주 왜 아직도 맛없냐고 묻는다면…

중앙일보 2016.12.09 01:34 종합 22면 지면보기
북한산 대동강맥주를 마시고 있는 다니엘 튜더.

북한산 대동강맥주를 마시고 있는 다니엘 튜더.

4년 전 나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서울특파원으로 일했다. 솔직히 당시엔 한국 이슈로 편집진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한국 대선이 임박한 시점임에도 그들은 북한에만 관심이 있었다.

외국인 기자가 본 맥주 시장 그늘
한국 글로벌 경쟁력 맥주만 예외
빅3 기업, 매출 0.4%만 R&D 투자

하지만 나는 한국 맥주시장 기사를 쓰고 싶었다. 한국 맥주는 왜 그리 심심할까. 나를 비롯해 2012년 한국에 사는 외국인과 유학생 출신들 사이에서 자주 화두로 떠오른 질문이다. 궁금한 건 많았다. 자료를 찾아볼수록 더욱 그랬다. OB맥주와 하이트진로, 이 두 메이저사의 영업이익률은 두 자릿수인데 왜 연구개발 투자비는 매출의 1%에도 한참 못 미치는 걸까. 또 이런 궁금증도 있었다. 집 근처 편의점이란 편의점은 왜 355ml 국산 캔맥주를 죄다 1850원에 팔까. 단 두 업체가 과점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수치였다. 설령 국내에선 독과점 기업이라도 세계시장을 상대로 하는 한국 기업 특성상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할 텐데 왜 맥주업계만 예외로 남았을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정위가 독과점 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맥주업계 상위 3개사의 영업이익률은 64.9%(2013년 기준)나 되는데 연구개발 투자비는 여전히 매출의 0.41%밖에 되지 않는다.
 
‘더부스’에서 만드는 ‘대동강페일에일’과 장기하와 컬래버레이션한 ‘ㅋ’ 맥주.

‘더부스’에서 만드는 ‘대동강페일에일’과 장기하와 컬래버레이션한 ‘ㅋ’ 맥주.

내용만 보면 이코노미스트 편집진이 좋아할 기사였다. 그러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다른 게 더 필요했다. 고민하던 중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맛 좋은 북한 대동강맥주가 생각난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게 2012년 11월 24일자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는 한국 맥주(Fiery Food, Boring Beer)’ 기사다.

대동강맥주 생산설비는 176년 역사를 가진 영국 맥주회사 어셔 트로브리지의 것이다. 2000년 폐업한 어셔 트로브리지 장비를 150만 파운드(약 22억원)에 수입한 북한은 독일의 기술 자문을 받아 설치를 완료했고, 2002년 대동강맥주가 탄생했다. 해외에 알려진 북한 맥주는 대동강맥주가 유일하지만 사실 북한은 도시마다 개성이 다른 양조장을 가지고 있다. 지도층이 마시는 맥주는 대동강·룡성·금강·봉학 4개로 압축되는데, 내 입맛에 제일 맞는 맥주는 이 4개가 아닌 경흥맥주다. “북한 주민은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지역 양조장에 가서 바로 사 마신다”는 탈북자 이제선(가명)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보다 치열한 경쟁으로 품질을 높이고 있다니 꽤나 역설적이었다. 그렇게 북한 이야기를 넣어 기사를 완성했다. 기사를 송고하고 다시 한국 대선에 집중했다. 맥주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13년 초부터 여러 신문과 TV방송에서 전화를 받았다. 기자들은 궁금해했다. 한국 맥주가 정말 그렇게 맛이 없나? 대동강맥주가 정말 더 나은가? 그런데 영국 음식은 진짜 맛없지 않나? (대답은 다 ‘맞다’였다.)
대기업 독과점 구조인 한국 맥주업계에 소규모 크래프트(수제) 업체들이 뛰어들어 활력을 입히고 있다. 제각각 색깔과 맛을 달리하는 국산 크래프트 맥주와 전용 잔들. [사진 장진영 기자]

대기업 독과점 구조인 한국 맥주업계에 소규모 크래프트(수제) 업체들이 뛰어들어 활력을 입히고 있다. 제각각 색깔과 맛을 달리하는 국산 크래프트 맥주와 전용 잔들. [사진 장진영 기자]

그러던 중 한국인 커플(지금은 부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크래프트(수제) 맥줏집을 준비 중인데 사업 파트너가 돼 달라”는 요청이었다. 맥주 사업을 하려고 기사를 쓴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 경리단길 ‘더부스(The Booth)’에 동참했다. 맥주 안주로 피자를 파는 게 화제가 돼 ‘피맥(피자+맥주)’이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맥주 양조는 한국과 미국에서 공동 진행하고, 덴마크 미켈러 같은 맥주를 수입하거나 공동 생산하고 있다. 매장이 10개로 늘어나 올해 매출은 86억원으로 예상한다.

기대보다 좋은 성과다. 요즘은 호프 맛이 강한 에일과 과감하고 실험적인 미국 스타일 크래프트 비어가 세계적으로 유행인데 이를 한국에 맞게 도입한 덕분이다. 미국도 오랫동안 버드와이저·쿠어스 등 심심한 맛의 라거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했지만 20년 전부터 크래프트 맥주가 두각을 드러내며 시장 점유율을 12%까지 높였다.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시장 점유율은 시장의 0.5%에 불과하다. 아직 성장의 여지가 많은 셈이다.
국산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도 늘고 있다. 사진은 백곰막걸리&양조장에서 맥주를 따르는 모습.

국산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도 늘고 있다. 사진은 백곰막걸리&양조장에서 맥주를 따르는 모습.

나는 이만큼 이룬 성과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정부 규제가 맥주 양조(브루어리)에 좀 더 유리했다면 결과가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면허 취득 시설 기준이 너무 높아(당시엔 최소 생산량 10만L) 처음에는 자체적으로 맥주를 주조하지 못하고 ‘카브루’라는 업체를 통해 외주생산을 해야 했다. 결국 규모가 영세하면 펍을 여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매장에 맥주를 납품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다행히 2014년 19대 국회에서 주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덕분에 이젠 일반 카페에서 쉽게 수제 맥주를 만날 수 있고, 국내 수제 맥주의 품질도 좋아졌다.

그래도 남은 규제가 많았다. 주세법 개정안을 냈던 홍종학 전 의원에 따르면 맥주에 종량세 대신 종가세를 적용하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제조원가에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는 규모가 영세할수록 불리하고 품질 개선보다 비용 최소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맥주만 종량세로 바꾸면 공정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종가세 철폐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전체 주세를 개정하면 고가의 수입양주나 와인의 세금이 낮아지는 효과가 생겨 정부가 꺼린다.

맥주 세율은 소주·위스키 같은 증류주와 똑같이 72%나 되는데 막걸리는 값싼 전통주라는 이미지 덕에 세율이 5%에 불과하다. 노동자와 농부가 막걸리 주 소비층이었던 시절에는 근거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비싼 명품 막걸리도 많은데 세율이 여전히 5%라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2004년 노원구에서 수제 맥주 펍을 연 김정하 바네하임 사장은 “현재 종가세를 유지해야 한다면 원가에 포함된 인건비·기계감가상각·임대료 부분은 삭제해 고급 인력과 좋은 기계를 통한 맥주의 질적 향상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주세 정책이 맥주산업의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맥주보다 국산맥주 캔에 부과되는 총 세금이 더 높을 때가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본 기사(조세일보의 ‘역차별에 우는 국산맥주’)에 따르면 과세 기준으로 삼는 기준 도매가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예컨대 수입맥주는 수입원가에 관세만 더한 데에 과세하지만 국산맥주는 제조원가에 관리비용·유통이윤까지 더한 후 과세해 과세 표준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산맥주가 더 비싸다 보니 수퍼마켓에서는 수입맥주가 국산맥주보다 인기가 좋다.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국내 업체도 다양하고 깊은 맛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미 맥주 브랜드가 상당히 많은 영국에서도 크래프트 맥주는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한 지 오래다. 한때 영국에서 대량생산 맥주를 대표했던 워트니콤레이드 3대 상속자 닉 워트니는 “대량생산 라거보다 개성과 맛이 풍부한 맥주를 선호하는 게 트렌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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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새로운 풍미와 다양한 맥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흐름은 엄청나다. 그러나 2005~2014년 10년간 맥주 양조업체는 118개에서 61개로 오히려 감소했다. 높은 세율과 종가세는 다양하고 품질 좋은 맥주 생산과 영세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 미국의 전설적 록 뮤지션 프랭크 자파는 “맥주업체와 항공사가 없으면 진정한 국가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량생산 맥주를 마셔 보고 북한의 고려항공을 타 본 나는 여전히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맥주는 북한이, 항공은 한국이 낫다. 당장 통일이 안 되면 한국 맥주 과세라도 바꾸자.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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