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북을 열며] 또 다른 정유라는 있다

중앙일보 2016.12.09 01:00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승현 편집국 EYE24 차장

김승현
편집국 EYE24 차장

1년여 전 한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트린 사건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사상 초유의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혼을 빼앗겼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 또한 내년 이맘때면 아스라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2015년 12월 인천의 한 수퍼마켓에서 11살 A양이 발견됐다. 빵을 훔치려는 것인지 만져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느리고 힘없는 아이의 동작과 몰골은 처참했다. 한겨울인데도 맨발에 반소매 옷을 입었고 눈빛은 초점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이인데 몸무게는 네 살 아이 평균인 16㎏에 불과했다. 충격적인 CCTV 영상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너무도 기이한 상황을 수퍼마켓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고, 아이를 2년 동안 감금하고 학대한 아버지(33)와 그 동거녀(36) 등이 경찰에 붙잡혔다.

A양은 2013년 인천의 한 빌라에 이사온 뒤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이 없는 상태로 온라인 게임에 빠져 있었고, 툭하면 아이를 때리고 밥도 먹이지 않았다. “훈육을 위해서였다”는 변명은 공분을 자아냈다.

1년 전 장기 결석 아동의 심각성을 알게 한 인천 연수구 아동 학대 사건이다. ‘잊혀진 아이들’은 더 충격적인 모습으로 속속 나타났다. 경기도 부천에서는 아버지에게 맞아 숨진 초등학생이 3년 만에 발견됐다. 가출 신고된 여고생은 11개월 만에 자신의 집에서 백골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의 부모들은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는 미취학·장기결석 초중생 전수 조사를 실시했고 약 3000명의 학생을 조사해 30여 건의 아동학대를 확인했다. 이준식 부총리는 “앞으로 빈틈없는 안전망을 운영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5일 최순실씨와 딸 정유라에 대한 감사 결과는 장기 결석 사건과는 극과 극의 모습이면서도 묘한 데자뷔를 이룬다. 1년 전 흙수저 아이들의 비극에 심장이 내려앉았다면, 이번엔 금수저 학생의 비리에 치를 떨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게 다 일까”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인륜을 등진 부모와 스승의 도리를 저버린 학교가 속속 적발됐던 것처럼 제 자식만 챙기는 부모와 돈과 권력에 아부한 교사가 분명 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희연 교육감은 “21세기 한국의 학교와 교실에서 이런 노골적인 압력, 수뢰, 폭언, 기망, 조작, 특혜가 자행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지만 정부의 실패는 한 건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시민의 상식이자 경험이다.

“학교가 어떤 권력과 금력의 압력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곳이 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은 공염불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의 시체가 실려 나오는 걸 보고도 장기 결석 학생 조사를 가정 방문도 없이 전화 한 통으로 때웠다가 들킨 게 불과 1년 전이다.


김 승 현
편집국 EYE24 차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