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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전경련 개혁 ‘껍데기만 헤리티지’는 안된다

중앙일보 2016.12.09 01:00 경제 2면 지면보기
전영선 산업부 기자

전영선
산업부 기자

“일본 사사카와재단을 모델로 개편하자”

산은·기은까지 탈퇴 도미노
민간 연구기관으로 재탄생 추진
보수 싱크탱크 넘어선 대안 검토를


본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정리 방안을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하면서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받은 답변이다.

A급 전범 용의자로 지정됐다 불기소 처분을 받은 전력의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세운 재단(일본재단으로도 불림)을 굳이 전경련 개혁 모델로 꼽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사사카와재단은 사회공헌 조직으로 세계에 지일파를 늘린다는 명목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역사왜곡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온 대표적 단체이기도 하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뭔가 특별한 벤치마킹 요소가 있을 수도 있어 해당 의원에 이를 문의하자 “통상기능을 강화하자는 취지”라는 애매한 메시지가 돌아왔다. 해당 의원실은 문의를 한지 몇 십분 뒤 “사사카와재단이 아닌 미국 헤리티지재단 모델로 개편하자”로 수정된 답변을 보내 왔다.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씁쓸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문제가 생기면 목청을 드높이지만 전경련의 개혁이나 역할을 둘러싼 논의에 정치권이 그리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다. 전경련의 개편 방안으로 거론되는 연구기관이나 공공재단으로의 존재 이유, 나아가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별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 9명이 선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 9명이 선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전경련 회원사로 활동해 온 재계, 즉 600여곳에 달하는 회원사도 마찬가지다. 기업 관계자들은 전경련 개혁 방향으로 앞다투어 헤리티지를 꼽는다. 그러나 “왜 헤리티지인지”를 물으면 딱히 이유를 대진 않는다. 헤리티지를 닮은 전경련을 통해 기업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 경제 혹은 사회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무엇이 좋아질 수 있을지를 가늠이라도 해보고 답변하는 것일까. 그저 많이 알려진 보수 싱크탱크라서 헤리티지 재단을 꼽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답변자도 많았다.

사실 헤리티지는 세계의 수백개의 유명 싱크탱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현재가 아닌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다. 실용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통계와 분석, 정책과 기사에 당장 쓸 수 있는 전문가 코멘트를 바로 전달해주는 방식은 지금은 일반적이지만 당시엔 혁신적 변화였다. 이는 사회 경제 현상을 실컷 분석해 놓은 결과물을 책장에 고이 꽂아두고 나 몰라라 하던 사회과학도들의 태도에도 변화를 촉진했다. 헤리티지는 연구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힘있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유통하면서 힘과 명성을 쌓았다.

요즘의 사회의 모습은 당시와 사뭇 다르다. 정보 유통 속도와 양은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세상을 조망하는 방법도 셀 수 없이 다양해졌다. 전문가는 도처에 있고, 이들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해석도 복잡해졌다.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은 이런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실험과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도 고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헤리티지의 옛 영광의 끝자락만 보고 달려들어 말만 거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대목이다. 민간 연구기관으로 재탄생하겠다는 전경련에 대한 논의를 단숨에 끝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이유다. 시작은 뼈저린 반성이어야 한다. 전경련 해체 또는 개편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왜 국민은 전경련을 신뢰하지 않는지 말이다. 삼성 등 일부 대기업에 이어 8일 산업은행과 기업은행도 전경련 탈퇴를 선언했다. 새로 태어나고 싶어도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전영선
산업부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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