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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한반도에서 원전이 폭발한다면?

중앙일보 2016.12.09 00:01
한국영화 최초로 원전 재난을 그린 ‘판도라’. 그동안 여러 재난영화에서 대형 쓰나미·치명적 바이러스 등 다양한 재난 상황을 다뤄 왔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섬뜩한 현실로 다가온다. 최근 몇 년간 노화된 국내 원전 시설의 위험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9월 경북 경주 지역에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하며 다시금 원전 안전 문제가 불거졌다. 그만큼 ‘판도라’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원전 재난은 우리 일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이 영화에 묘사된 원전 재난 풍경을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했다.
Q1 원전 사고는 어떻게 국가적 재난으로 확대될까?
극 중 한반도 동남권에 위치한 어촌 ‘월촌리’. 이곳에 설립된 ‘한별원자력발전소’는 40년 넘게 마을 주민들의 일자리와 지역 경제를 책임져 온 ‘밥솥’ 같은 시설이다. 평화롭던 월촌리에 어느 날 갑자기 초대형 지진이 발생한다. 시설 보수와 점검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한별원전 1호기는, 지진의 충격으로 원자로 냉각수 유출 사고를 일으킨다. 급기야 압력을 견디지 못한 원자로 격납고가 폭발하며 재혁을 비롯한 수많은 원전 노동자들이 건물 내부에 갇히고, 마을 역시 폭발의 여파로 폐허가 된다. 더 끔찍한 것은, 냉각수로 보호했던 핵연료가 공기 중에 노출되며 원전 시설이 녹아내린 상황. 원전에서 새어 나온 방사능은 인근 도시로 퍼지며 국가적 재난으로 확대된다. 그럼에도 원전 측은 어떻게든 손실을 줄이기 위해 사태를 축소해 시설을 보전하려 든다.
전작 ‘연가시’(2012)에 이어 두 번째 재난영화 ‘판도라’를 만든 박정우 감독. 그의 목표는 뚜렷했다. “우리나라에 원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일어날 법한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판도라'에서 꺼낸 세 가지 질문

그는 4년 전부터 원자력 관련 서적·영상 등을 들여다보며 각본을 준비했다. 보안 문제로 인해 국내 원전 취재는 불가능했기에, 한국 원전 모델과 흡사한 것으로 알려진 필리핀 바탄원자력발전소를 답사해 정보를 얻었다. 제작진은 강원도 춘천 지역에 5000평(약 1만6500㎡) 규모의 실물 크기 원자력발전소 세트를 지었으며, 촬영 이후 정교한 CG(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거쳐 실감 나는 원전 격납고 폭발 장면 등을 완성했다. 그뿐 아니다. 원전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재난 상황이 악화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구현했다.

복구팀과 구조팀이 차례로 투입되는 재난 현장 풍경까지 디테일하게 담았다. ‘판도라’의 원전 관련 자문을 맡은 동국대학교 의대 김익중 교수(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는 “영화적 설정을 위해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극 중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에서 그대로 일어난 일”이라 설명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판도라’ 속 사건은 90% 정도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만큼 원전 재난이 발생하고 확대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원전 사고의 경우,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재난이다. 그 위험성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박정우 감독

 
Q2 정부와 기업은 원전 재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분초를 다투는 긴급한 상황임에도 청와대 상황실은 원전 참사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 한별원전 1호기 재가동 법안을 통과시켰던 국무총리(이경영)는, 사사건건 정치적 마찰을 빚는 대통령(김명민)이 재난 상황을 자세히 보고받지 못하도록 사태를 은폐하거나 축소시킨다.
 
 

대통령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대참사를 방지할 골든 타임을 놓쳐 버린 시점이다. 대통령이 직접 재난 수습에 나설 때조차 총리는 “국민 혼란이 우려된다”는 것을 이유로 언론 보도를 통제한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보다 원전 시설 보전과 정보 통제에 더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원전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5000만 국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대통령은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원전 재난에 대한 정부 대응 체계를 조사하던 박 감독이 가장 우려한 점은, 복잡한 재난 대책 조직이나 형식적인 재난 대응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산·경주 등 인구 밀집 도시 인근에 국내 주요 원전이 위치해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원전 재난이 벌어진다면, ‘판도라’에서처럼 피난 인파가 몰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아비규환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다. 김익중 교수는 “인구 밀집 지역에 위치한 국내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날 경우, 그 피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라 꼬집는다. “고리원전(부산)·월성원전(경주)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인근 30㎞ 이내 도시까지 방사능 피폭 영향권에 들게 된다. 그러나 촉박한 시간 안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대피시킬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정부 차원의 구조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말이다. ‘판도라’는 ‘원전 재난’이라는 무시무시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우리 정부가 어떻게 원전 재난에 대비해야 하는지 강력한 경종을 울린다. 그와 함께 재난 상황을 통제하는 국가 지도자의 미덕도 일깨운다. 극 초반, 대통령은 정치·경제적 딜레마에 빠진 채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재난이 악화될수록 점점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리더로 거듭난다. 지휘부의 무능함을 진솔하게 인정한 뒤,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는 겸허한 태도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판도라’는 대통령이 재난을 겪으며 진정한 국가 원수로 변모해 가는 일종의 성장영화다.

“재난영화에 공식처럼 등장하는, 정부 고위 관료들의 무능한 모습을 관습적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국가적 재난 생황에서 안전 의식 없이 잘못된 판단을 무조건 밀어붙이는 정치인과 전문가의 고집은 위험하다. 하지만 원전 재난은 현존하는 그 어떤 국가 대응책으로도 막을 수 없다. ‘판도라’를 통해 그 점을 상기시키려 했다.” 박정우 감독
 
Q3 재난에 직면한 개인은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판도라’의 한별원전은 어느새 손쓸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다. 공기 중에 노출된 핵연료가 원전 시설을 붕괴시켜, 적지 않은 방사능이 인근 도시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수소 폭발까지 일어나면, 그때는 온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방사능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돼 정부마저 통제권을 잃은 상황.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의료진조차 철수한 임시 진료소에 남아 있던 재혁과 동료 기술자들이다.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만큼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된 그들은, 피폭된 몸을 이끌고 지옥 같은 원전으로 돌아간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살리겠다’는 영웅심이 아닌 ‘살아남은 가족이라도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재혁은 말한다. “억울하고 분해도 우리가 해야 합니더. 우리 말고 들어갈 사람이 없어예.” 원전 재난의 위험성을 미리 경고했던, 전 한별원전 소장 평섭(정진영) 역시 “집주인이 안 들어가면 되겠습니까?”라며 끝까지 현장을 통솔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전형적 영웅이 아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사람의 인간이요, 재난 현장에 남겨진 마지막 희생자일 뿐이다.
 불타는 원전 속에서 재혁이 마주한 감정은 재난을 극복하려는 용기가 아니며, 이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에 대한 분노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 죽기 직전에 느낄 법한 ‘거대한 두려움’이다. 그 순간 재혁을 지탱하는 건 남겨질 가족과 이웃의 미래에 대한 소소한 희망이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그는 내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처럼 “재난은 여러 절망과 슬픔을 남겼지만, 그 속에는 내일을 향한 작은 희망도 있었다”고. ‘판도라’가 재난을 통해 역설하는 진심이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재혁이 두려움에 떠는 장면을 보며, 관객도 똑같이 무서움을 느끼길 바랐다. 마치 자신에게 닥친 일처럼 말이다.
그 모습은 지금껏 우리 사회가 겪은 재난 상황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났다. 언제나 재난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힘 있는 영웅이나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었으니까.”
박정우 감독


 
전문 용어로 살펴본 ‘판도라’의 원전 재난
로카(LOCA, Loss of Coolant Accident·냉각재 상실 사고)

원자로 내부의 엄청난 열기를 중화할 냉각 기관이 파손된 상황. ‘판도라’에서는 40년간 가동된 노후 원전의 냉각수가 진도 6.1 규모 지진을 겪으며 누출된 것으로 묘사된다. 5년 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경우, 원전 냉각 장치에 전력을 조달하던 디젤 발전기가 지진·쓰나미 등의 여파로 작동을 멈추면서 로카 상황이 발생했다.

멜트다운(Meltdown·노심용융)

원자로 내부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현상. 원래 냉각수에 잠겨 있어야 할 핵연료가 냉각수 상실로 인해 공기 중에 산화하며 방사능 물질을 대량 방출하게 된다. 원전 사고에서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 중 하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원자로 1·2·3호기가 모두 멜트다운됐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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