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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3. 기시감 (1)

중앙일보 2016.12.09 00:01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잠을 깼다. 커튼을 열어젖힌 아내가 돌아서며 “굿모닝!”하고 밝게 인사했다. 혁은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얼결에 “응, 굿모닝.” 하고 대답했지만 잠이 깊었던 듯 몸과 의식의 감각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곁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옆구리로 파고드는 아내의 묵직한 엉덩이와 따뜻한 감촉으로, 혁은 그제야 조금씩 현실감각을 회복했다.
 
“몇 시야?”
 
“5시 32분.”
 
“오후?”
 
“그럼 새벽이겠어?”

 
눈을 가렸던 팔뚝을 내렸다. 환하게 미소 짓는 아내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울어?”
 
“아니.”
 
“울고 있는데?”

 
혁은 손을 뻗어 아내의 뺨을 어루만졌다. 역시나 축축했다.
 
“일어나, 영화 보러 가자.”
 
금세 표정을 바꾼 아내가 책장 앞에 걸려 있는 옷을 옷걸이 채로 가져와 혁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내 꺼?”
 
“응, 어때?”

 
짙은 감색의 벨벳 원단에 팔과 다리에만 은색으로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트레이닝복이었다. 새로 사 왔는지 상품텍까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색감 참 좋다.”
 
“그치? 점심 먹고 잠깐 백화점 갔다가, 이걸 보자마자 당신 생각이 나서 샀어.”

 
혁이 상체를 일으켜 옷걸이를 받으려 하자 아내가 등 뒤로 감추며 안방에 딸린 욕실 문을 가리켰다.
 
“세수라도 좀 하고.”
 
“아, 그래. 세수라도 좀 하고.”

 
대충 씻고 나와 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입고 보니 어쩐지 익숙했다. 모양도 감촉도 사이즈도 오래 입어 길들여진 듯 편안했다. 아내에게 똑같은 옷이 하나 더 있지 않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아내가 그것도 모르고 똑같은 옷을 또 사 왔을 리 없었다.
포장된 길 위를 걷는 다리의 감각이 이상했다. 허공을 붕붕 나는 듯 가볍기도 하고 땅으로 푹푹 꺼지는 듯 무겁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외출한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머리도 묵직했다.
혁은 아내와 함께 단지 앞의 8차선 도로를 건너 종합 스토어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처음 이사 왔을 때보다는 동네가 많이 정돈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몇몇의 사람들만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을 뿐 여전히 조용했다. 이 지역을 개발한 건설회사에서 광고를 하지 않아 사람들이 입소문만으로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잘 됐지, 뭐. 당신 조용한 거 좋아하잖아.”
 
아내는 혁을 위해 일부러 한적한 지역으로 이사했을 것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움직였을 리 없고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온 때가 언제였더라? 혁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요즘 부쩍 그런 일들이 잦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거기 있고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혁은 불안했지만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질 수도 있는데 공연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는 혁의 이런 증상들을 알고 일부러 한적한 지역으로 요양 삼아 이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종합 스토어에 당도하자마자 두 사람은 먼저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혁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아내는 시장할 것 같아 혁이 먼저 그렇게 하자고 했다. 아내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가인 13층으로 올라가서 저녁을 먹고 11층에서 영화를 본 다음 쇼핑은 거꾸로 내려오며 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혁이 먼저 왼쪽으로 돌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혁은 갑자기 왕성해지는 식욕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실내에 배어있는 익숙한 냄새가 혁의 위장을 자극했다. 지배인 배지를 달고 있는 남자가 가져온 메뉴판에는 완성된 요리의 사진 옆에 재료와 요리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모두 혁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아내가 어패류가 들어간 샐러드를 주문한 뒤에도 한참 동안 고르지 못해 망설이는 혁에게 지배인이 삶은 채소와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권했다.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다 먹어치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일단 그걸로 하겠다고 했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적당히 푹신한 좌석에 씌운 푸른 벨벳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하얀 리넨 원단을 덧씌운 테이블에는 얼룩 한 점 없었다. 적재적소에 놓인 장식품과 화분들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심플한 메인 조명과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매몰된 간접 조명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적당한 빛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나온 음식도 기대했던 대로였다. 어릴 때 양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 같기도 하고, 사고 전에 아내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즐겨먹던 단골 메뉴 같기도 했다. 아내도 자기 몫의 샐러드와 혁의 스테이크를 번갈아 먹어보며 연신 맛있다고 칭찬을 늘어놨다. 하지만 먹는 속도에 비해 음식이 좀처럼 줄지 않았다. 결국 양쪽 모두 절반 이상 남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나오면서 혁은 욕심껏 주문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영화관이 있는 11층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혁의 발걸음을 느긋하게 만들었다. 거리와 식당의 한산했던 풍경에 비해 영화관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벌써 인사를 나눈 사이들인지 몇몇이 아내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남편분이신가 봐요?”
 
“네, 그쪽은……”
 
“맞아요, 우리 딸 예라.”
 
“아, 정말 예쁘네요. 사진이랑 똑같아요.”
 
“예라야, 아줌마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엄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제 엄마 옆에 서서 웃고 있는 소녀의 표정이 투명했다. 너무 투명해서 그 안의 순순한 뼈와 뇌의 주름까지 죄다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그 눈빛은 어쩐지 공허했다. 조금은 겁을 먹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면 짧게 웃다가도 이내 고개를 떨어뜨릴 때마다 미간에 잡히는 엷은 주름을 혁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영화는 혁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저 그랬다. 소녀가 엄마와 함께 보러 온 영화라서 소녀 취향의 감성 영화이거나 따뜻한 가족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폭력 수위가 너무 높았다. 등장인물들은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아무 데서나 벗고 섹스했다. 그런 장면들을 삽입하기 위해 잘라먹은 프레임 탓인지 앞뒤 전개마저 허술했다. 전에도 혁은 아내와 종종 함께 보던 장르의 영화였기 때문에 딱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뒤쪽에서 같은 화면을 응시하고 있을 소녀의 시선이 의식돼 몰입할 수 없었다. 누구의 제안으로 함께 보러 왔는지는 모르지만 등급 확인도 하지 않은 그 엄마의 무신경이 한심했다. 소녀는 많이 봐 줘도 열대여섯 살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확인과 제재도 없이 들여보낸 상영관 측의 허술한 관리에도, 혁은 자꾸만 화가 났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혁은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일어서려는 아내의 손을 잡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쪽도 뒤늦게 곤혹스러워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앉아 있자.”
 
“응?”

 
돌아보는 아내의 눈빛에 담긴 의혹이 너무 커서 당황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조금만 더 앉아 있자고.”
 

혁은 아내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나 싶어 빠르게 덧붙였다.
 
“영화 수위가 너무 높아서. 예라라고 했나? 아까 그 소녀를 만나면 좀 겸연쩍어질 것 같아서.”
 
“아, 그래. 맞다. 그래, 조금만 더 앉아 있다 가자.”

 
그래도 아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둘만의 공범 의식으로 눈빛이 오가고 동시에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을 텐데, 아내는 빈 스크린을 쳐다보며 애써 울음이라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혁은 무슨 말이든 하여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려다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요즘 부쩍 이런 식의 어긋남이 잦았다. 예를 들어보라면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랬던 것 같았다.
앞자리에 앉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일어나 나간 후에야 혁은 아내의 손을 잡고 일어나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영화관 밖에서도 아내는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예전 동네에서는 회사 일로 바빠서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지 못했는데,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는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는지 의아했다. 아파트까지 걸어오면서 아내가 혁의 표정을 의식했는지 변명처럼 이 동네는 월례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린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덕분에 오며 가며 사람들과 인사하며 지내니까 좋더라.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당신도 친해지면 알게 되겠지만.”
 

혁은 갑자기 몹시 피로해졌다. 너무 많이 보고 듣고, 너무 많이 돌아다닌 탓인 듯했다. 아내가 계속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빨리 돌아가 눕고만 싶었다. 회사에 다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고 묻는 아내의 말이 차라리 고맙게 느껴졌다. 더 이상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고, 또 적절하게 대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내와 길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돌아와서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혁은 너무 지쳐 있었다.
 
 
 
*
 
 
얼추 구도가 갖추어진 그림을 바라보다 완은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숙취로 아직 찌뿌둥한 데다 산길을 걸으며 흘린 땀과 먼지가 밴 트레이닝복도 꿉꿉했다. 먼저 샤워부터 할까 하다가 일단 시장기부터 메우기로 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여주댁이 아침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복 살을 다져 넣고 끓인 부드러운 죽이었다. 여주댁은 따로 말을 해 두지 않았는데도 어제의 행사로 과음할 것을 알고 미리 수산 시장까지 나가 신선한 전복을 구해왔을 것이다.
뱃속이 든든해지니 마음도 덩달아 든든해졌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물로 오래 샤워를 하고 나와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주댁이 얼음을 띄운 화채를 올려 와서 마시고 작업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창백한 겨울의 오전 햇살이 창에 드리운 커튼의 겹을 통과하여 부드럽게, 적당히 따뜻한 실내에 드리워져 있었다. 완은 탁자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 누운 채로 읽었다.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형석이 꿈속으로 찾아왔지만, 완은 이제 주눅 들지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지도 않았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형석은 언제나처럼 낡은 스웨터 차림으로 어두운 방구석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된 그림을 표구한 캔버스를 한 손에 늘어뜨려 들고서였다. 완은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형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완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캔버스를 건네주고는 걸어서 방을 나갔다. 완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그림이었다. 갓 서른이 넘은 신인 치고는 당시에도 꽤 비싼 값에 팔렸다. 지금은 누구의 소유인지 몰랐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누구누구를 거쳐 10여 년 전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식만 지사장을 통해 들었다.
완은 꿈에서 깨어 대충의 윤곽만 잡아 놓은 새 캔버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쳐다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다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참으로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이었다.
 
오후가 되어 다시 집을 나섰다. 약수터 쪽으로 길을 잡고 가다가 고등학교 앞에서 멈춰 섰다. 10여 미터쯤의 골목 같은 진입로가 텅 비어 있었다. 학교 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산길이 시작되기 직전의 공터 앞에서 돌아섰다. 고등학교로 내려와 비어 있는 진입로를 확인했다. 다시 올라가다 말고 돌아서 학교 쪽을 내려다봤다. 몇몇의 학생들이 진입로를 빠져나와 아파트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은 얼른 학교 앞으로 달려가 섰다. 학생들은 다들 무뚝뚝한 얼굴로 재빨리들 지나쳐 좀처럼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한참 동안 서성이다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여학생 하나를 붙들고 수업이 다 끝났느냐고 물었다. 수업은 끝났지만 아직 종례와 청소가 남았다고 여학생이 말했다. 더 물을 말이 있냐는 듯 물끄러미 올려다봐서 고맙다고 말하고 길을 터줬다.
10여 분쯤 지나자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표정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막상 만나면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림 속 소녀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그 위에 아침에 본 소녀의 차림을 덧입혔다. 긴 머리에 머리띠처럼 둘렀던 연둣빛 헤드폰도 소녀를 알아보는 징표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재빨리, 그러면서도 찬찬히 살폈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각각의 개성을 갖춘 소녀와 소년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길이와 모양과 교복을 입은 맵시와 표정들도 제각각이었다.
완의 시선을 받은 여학생들이 완을 힐끔거리며 지나쳐갔다. 함께 가던 남학생들에게서는 경계와 적의의 시선마저 느껴졌다. 아버지라고 하기엔 늙었고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젊은 완이 교문 앞을 서성이며, 특히나 여학생들을 위주로 탐색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수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완은 꿋꿋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다시 진입로가 한산해졌다. 선생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지나가고 드물게 이어지던 아이들의 발길마저 끊길 때까지, 소녀는커녕 비슷한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주변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완은 지쳐서 이제 그만 돌아갈까 생각했다. 몇 시간을 선 채로 떨었더니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도 묵직했다. 생각과 달리 걸음은 천천히 학교 안으로 향했다. 드문드문 불 켜진 교실들이 있었다. 한 개 층의 창문은 전부 환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실시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완은 내친걸음이니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운동장가의 벤치에 허리를 접고 앉았다. 짧은 겨울해가 앞산으로 넘어가고, 금세 주변이 깜깜해졌다. 구름이 잔뜩 꼈는지 하늘도 어두웠다.
완은 오랜만에 찾아온 형석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의미였을까. 이제 꿈속으로라도 찾아오지 않겠다는 뜻이었을까. 이제 내 마음대로 내 그림을 그려보라는 뜻이었을까.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지만 형석도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형석에 대해서는 그 외의 다른 것들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어머니는 도망간 지 오래라는 소문만 건너 건너의 친구를 통해 들었을 뿐이었다.
완은 중학교 때부터 의대에 다니는 첫째 형과 법대에 다니는 둘째 형, 공학도인 셋째 형과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아버지의 관용차에 실려 화실과 학교와 집만 오갔다. 삼 년 동안 같은 학교를 다니며 일 년 동안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낡아빠진 교복 차림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 한 형석과는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없었다. 한 교실 안에서도 그 경계는 너무 뚜렷했다. 완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온 뒤 선배가 운영하는 화실의 간이침대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형석을 다시 만났을 때에야 그도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남루한 차림으로 선배의 화실에 얹혀사는 청년이 고등학교 때 구석진 자리에서 항상 낙서처럼 무언가를 그리던 그 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형석은 한 번도 제대로 된 그림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형석의 눈이 언제부터 멀기 시작했는지도 완은 알지 못했다. 선배의 화실에 포장된 음식과 소주를 사들고 드나들다 가까워져 좀 더 특별한 사이가 된 후에도, 형석은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선배의 화실에서부터 조금씩 달라지던 그의 그림이 가끔이나마 다니던 막일도 그만두고 완의 작업실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더디게 진행되던 병이 그 즈음 더 빨라졌으리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훗날 생각해 보니 그러했던 것이었다.
형석에게 태양은 점점 더 조도 낮은 흐릿한 불빛이 되어갔다. 특히나 어둠이 내리면 주변 사물들을 거의 구별해내지 못했다. 색채도 다르게 인식하는 듯했다. 주로 강한 노란 빛을 위주로 사용하다가 다른 색채들을 사용할 때에도 명도와 채도가 높고 강렬해지더니, 이내 파랑으로 옮겨갔지만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행이 멈추었는지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완이 진심으로 감탄사를 터뜨릴 때마다, 그러나 형석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아.”
 
형석은 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림은 너무 좋다는 말도, 이제 내가 너의 눈이 되어주겠다는 말도.
형석의 절망이 깊어가던 어느 날 완은 형석의 그림을 들고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은 그림만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완이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덥석 손부터 잡았다.
 
“자네, 언제부터 이리 달라졌나. 물론 아직 거칠기는 해. 그래도 참 신선하군. 내 이럴 줄 알았지. 언젠가는 이렇게 해낼 줄 알았어. 아버지가 흡족해하시겠구먼.”
 

완이 스승에게 그림을 보인 이유는 형석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네 그림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하고 그대로 전하여 자신의 재능을 믿게 하고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고 싶어서였다. 완은 선배의 화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형석이 웃는 모습을 진심으로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너무 큰 스승의 반응과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서 완은 끝내 그것이 형석의 그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형석에게도 스승의 말을 전하지 못했다.
스승은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다고 했다. 조만간 화실에 들르겠다고 했다. 완은 형석에게 스승의 말을 전하는 대신 작업실과 침실이 구분된 복층식 오피스텔을 하나 더 얻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화실에서만 생활하는 형석을 위해 좀 더 쾌적한 곳으로 진즉부터 이사하고 싶었다고 둘러대고 형석의 짐을 옮겼다. 몇 점 안되는 자신의 그림을 전부 옮기고 형석의 그림을 반만 옮겼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완은 형석의 약시를 질투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아무도 모르게 햇볕이 드는 실내에 두터운 커튼을 쳐서 어둡게 해 놓고 그려봐도, 강렬한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셔 색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옥상의 땡볕에 서서 눈을 찌푸려 뜨고 그려봐도, 완은 형석의 그림을 흉내 낼 수 없었다. 강렬한 빨강, 강렬한 노랑, 강렬한 파랑, 단 한 점만이라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스승에게 칭찬받고 이름을 내고, 형들처럼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눈이 멀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형석과 같은 재능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형석의 눈이 완전히 멀게 되어 그림은커녕 낮에도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점점 더 깊어가는 절망으로 피폐해져 가다가 침실로 통하는 이층 계단에 완의 넥타이를 엮어 목을 매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둘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때 그러지 않았을까. 완은 두 팔을 벌려 벤치 등받이에 올려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걷히는지 컴컴한 하늘 저편으로 이울어가는 달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형석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훔쳐 낸 그의 그림을 출품하여 당선 통보를 받은 날 완은 형석의 납골당을 찾아가 오래 울었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그가 남긴 그림들을 내놨고, 그가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을 덧칠하여 내놨다. 선배도 스승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형석이 남긴 그림들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무렵이라서 사람들은 완의 스타일이 달라져가고 있다고 평했다. 벌써 30여 년, 저쪽의 일이었다.
형석이 남긴 그림이 바닥을 드러낸 뒤에도 완은 평생토록 그의 흉내만 내며 살았다. 자신이 원래 어떤 그림을 그렸었는지도 진즉에 잊었다. 형석의 저주였을까. 긴 혀를 빼물고 이층 계단에 매달려 있는 형석의 시신을 마주한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완의 머릿속 이미지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형석이 나타나는 꿈 이외에는 꿈조차 꾸지 않는 인간, 영혼이 사라져버린 인간, 그게 바로 완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언덕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른 소녀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만의 이미지, 나만의 그림, 나만의 스타일. 완은 새삼 자신에게도 심장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두근두근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차임벨 소리가 나고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지친 표정으로 몰려나왔다. 형석의 눈에 비쳤을 어둡고 뿌연 세상 같은 풍경 속 아이들이었다. 색채도 농담도 없이 흐릿한 그 애들 중에도 소녀는 없었다. 어쩌면 무채 계열의 이런 풍경 속에서 반짝이는 연둣빛 그 소녀를 찾는 일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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