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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타깃 고르는 문학권력 비열…상 받으니 추근거림 끊겨”

중앙일보 2016.12.08 01:05 종합 24면 지면보기
문학동네 ‘문단 내 성폭력 특별좌담’
왼쪽부터 강지희, 정세랑, 오찬호, 문강형준, 김신현경.

왼쪽부터 강지희, 정세랑, 오찬호, 문강형준, 김신현경.

“20대 내내 심각하진 않더라도 불쾌한 추근거림(flirting)에 시달려야 했다 (…) 그런데 서른이 되면서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되고 나니, 그 모든 추근거림이 갑자기 사라졌다.”(문학평론가 강지희)

“비슷한 경험을 했다. 편집자로 일할 때 업무에 방해가 될 만큼 자주 겪어야 했던 불쾌한 경험들이, 작가로 데뷔하고 문학상을 받으니 뚝 끊기더라. 그렇게 차등을 두고 더 약한 타깃을 고르는 게 굉장히 비열하게 느껴졌다.”(소설가 정세랑)

최근 출간된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의 특별좌담에서 나온 여성 참석자들의 발언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폭로가 잇따르며 뜨거운 이슈가 된 문단 내 성폭력 사례가 문학권력 혹은 문학자산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문단의 성폭력 폭로 현상은 활발한 진행형이다. 가해자 검색이 쉽도록 ‘해시태그(#) 운동’이 SNS에서 벌어지고, 학생회가 중심이 돼 성폭력 사례 아카이빙을 하는 대학도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소설가 공지영씨가 위원장인 징계위원회를 꾸렸다. 사실 관계 확인을 거쳐 문제 문인을 제명 또는 자격정지 조치할 방침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문단 내 성폭력과 한국의 남성성’이라는 제목의 좌담은 단순 폭로에 그치지 않았다. 현 사태에 이르게 된 문단의 구조적 문제점, 그 이면에 도사린 한국 남성성의 실체, SNS 폭로의 효과와 함께 아니면 말고식 폭로의 문제점도 짚었다. 잡지 편집위원인 평론가 문강형준씨의 사회로 사회학자 오찬호, 여성학자 김신현경씨 등이 참석했다. 서른에서 마흔한 살까지 소장 지식인들이다.

좌담은 여성 참가자들의 자기반성에서 시작했다. 정세랑씨는 “문학출판계가 얼마나 추악하고 폭력적이고 여성을 착취하는지 본격적으로 피해생존자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극히 일부밖에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고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실상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성폭력을 가능케 한 남성중심 문단 실태를 결과적으로 용인하는 잘못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얘기다.

문학 외부자인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기존 경계를 허물고 구속을 벗어나려 하는 예술 특성에 대한 문인들의 오독(誤讀)이 지금의 사태를 불렀다고 진단했다. 지금 와서는 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지만, 행위 당시에는 본성과 자유로움에 충실한, 폭력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인 행위라는 인식을 가해자들이 가졌으리라는 지적이다. 낭만적 예술가에 대한 환상이 잘못 작동했다는 얘기다.

김신현경씨는 2001년 학생운동권 내 성폭력 고발 사례를 언급하며 현재 문단 폭로 상황이 전혀 새롭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잠잠하다 하필 지금 불거진 걸까.

강지희씨는 “어떤 사회든 구조의 힘이 세면 소수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어렵다”며 지난해 신경숙 표절 의혹이 제기되면서 한국문학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공유된 데다 작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경험을 한 것이 이번 사태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문학 혹은 문단이 더이상 고귀한 성역이 아니라는 얘기다.

김신현경씨는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이 SNS 사과를 하고 나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현실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을 포함한 공적 처리가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법대로’가 아니라 공론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시민적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좌담 참석자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도 있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시인들의 시집을 최악의 경우 절판을 전제로 출고정지시킨 데 대해 평론가 강지희씨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독자 개인의 차원에서 해당 문인의 시집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시스템이 작동해서 특정 문인이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고 글을 쓸 수 없도록 제약을 가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작가’와 ‘텍스트’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예술의 자율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강씨는 “발표된 작품에 (성폭력)피해 사실과 관련된 직접적인 재현이 들어가 있는 경우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그 경우조차 제3자가 객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정세랑씨는 “절판에 대한 논의는 가능한 논의라고 생각한다”며 “특히 법적인 처리가 불가능할 때 문학출판계 내에서 공적인 처리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공적인 처리로서의 절판은 무리일까요”라고 반문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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