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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kg 놀라지 말라, 10년 전만 해도 100kg씩 이상 잡았주"

중앙일보 2016.12.07 17:02
“먹고살젠. 물질하러 일본, 울산 방어진 할 거 없이 쫓아 다녔주(다녔어). 그땐 그냥 아이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젠(하려고) 무작정 물에 뛰어들어서. 근데 이번에 우리가 하는 일이 유네스코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막 지꺼져서(기뻐)”

67년간 물질(해녀가 산소통 없이하는 수중 채취 작업)을 해온 법환동어촌계 현수자(76) 해녀의 말이다. 그녀는 1940년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줄 곳 바다와 함께 살았다. 18살이 되자 그녀는 제주도가 좁았다. 4년간 돈을 벌기 위해 울산 방어진까지 원정 물질을 떠났다. 이곳은 특히 우뭇가사리가 많았다. 우뭇가사리는 일본에 전량 수출되는 효자품목이었다. 우뭇가사리가 원료인 한천이 일본인이 즐겨먹는 양갱의 주재료이기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나 한 달간 60㎏ 들이로 80포대나 수확해 방어진수협에서 수확량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광목원단을 받았을 때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추억한다. 이후 그녀의 바다는 옆 나라 일본으로까지 넓혀진다. 그녀의 일본 원정은 1985년부터 7년간 이어졌다. 1년에 2~3개월 정도는 현해탄을 넘었다. 짧은 기간에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어서였다.
현수자 해녀. 최충일 기자

현수자 해녀. 최충일 기자

이 기간, 한 달 중 15일은 한국에서,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살며 성게와 전복을 땄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1남2녀를 키우고 아들은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그녀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물질에 나선다. 지난주에도 이틀간 소라 160㎏을 혼자 채취했다. 하루 80kg인 셈인데 이는 40~50대 상군 해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다. 그녀는 힘이 닿는 한 계속 물질을 할 생각이다. “80kg가정 놀라지 말라. 10년 전만 해도 하루 100kg 이상씩 잡았주. 이번에 세계유산으로 인정도 받아시난 힘낭(힘이 나서) 80살까진 쭉 헐꺼라” 아직도 목소리가 또랑또랑하다. 해녀는 실력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주로 10m 이상의 깊은 바다를 주무대로 한다. 물질하는 3~5시간 동안 잡는 소라량이 100㎏ 이상인 경우가 많다. 중군은 그보다 상대적으로 얕은 수심에서 일하고 실력은 조금 못한 수준이다. 하군은 과거 15세쯤 되던 애기(새내기)해녀가 대부분이었다. 성인이 돼서 물질을 시작하는 최근의 상황으로 볼 때 현직해녀 중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주해녀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해녀 관련 단어들이 등장했다. 제주해녀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시기는 조선시대다. 1628년부터 1635년까지 7년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한 이건(선조의 손자)의 「제주풍토기」에는 해녀를 잠녀로 표현해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는 여자면서 부수적으로 '생복(생전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을 담당하는 자’로 묘사했다. 제주 해녀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 기록이다. 당시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에서는 해녀를 잠녀 혹은 잠녀라 부르고 ‘전복을 따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뜻하는 ‘비바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제주해녀의 기원을 원시시대까지 내다보고 있다.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는 패총(조개무덤)에는 전복과 소라 껍데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유철인 제주대 교수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패총의 연대를 볼 때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간다”며 “하지만 당시도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잠수를 해 조개류를 잡았는지 여부는 더 확인해봐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해녀에 대한 관심과 반대로 해녀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제주에 등록된 해녀는 지난해 기준으로 4337명이다. 지난 1965년 2만3081명이었던데 비해 50년 만에 81.2%(1만8744명)가 줄었다. 또 최근 5년간 504명의 해녀가 줄었는데 새로 들어온 해녀는 89명뿐이다. 지난해 기준 제주해녀 4377명 중 50세 이상이 98.6%(4314명)를 차지한다. 이중 50대는 563명(12.9%)뿐이고, 60대가 1411명(32.2%), 70대가 1853명(42.4%) 80대 이상이 487명(11.1%)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의 새내기 해녀를 키우는 해녀학교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07년부터 한수풀해녀학교가 문을 열었고, 지난해 5월에 개교한 서귀포 법환해녀학교는 본격적으로 직업 해녀 양성에 나서고 있다.
전소영 해녀. 최충일 기자

전소영 해녀. 최충일 기자

“젊은 친구들이 들어오니 어촌계 분위기가 활기차져서 즐거워” 하례리어촌계 양난초(74) 해녀는 웃어보였다. 지난해까지 6명에 불과했던 마을 해녀가 올해에는 10명이 됐다. 지난해부터 4명이 어촌계 들어왔는데 3명이 법환해녀학교 출신의 신입이다. 나머지 1명은 하례리 지역출신 현승민(34)씨로 해남이다. 법환해녀학교 출신 3명 중 전소영(38·여)씨는 하례리 어촌계가 38년 만에 받은 신입해녀다. 또 이들보다 좀 늦게 물질을 배운 이지혜(50·여)씨와 김지영(39·여)씨는 제주도의 지원으로 인턴해녀 6개월 과정을 밟고 있다.

전씨는 전문 프리다이버인 남편과 함께 다이빙을 즐기던 중 제주도의 바다에 매료돼 해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2014년 3월 경기도에서 제주로 이주해 하례리에 정착했다. 지난해 7월 법환해녀학교를 졸업한 후 9월부터 하례리에서 6개월 인턴과정을 소화했다. 올해 여름부터 어촌계의 가족이 됐다. 프리다이빙으로 갈고 닦은 실력이 있어 물에 대한 공포는 없었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그녀는 물질을 하는 3~5시간 동안 30~40㎏의 소라를 수확하는 실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도 40~50대 상군 해녀들에 비해 체력이 달린다고 했다. 그녀는 “해녀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숨참기 시간’”이라고 했다. 그동안 언론 등에서 주목했던 건 숨참기 대결 등 ‘해녀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어 대단하다’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물질은 숨참기보다 체력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물질은 일종의 마라톤 같아요. 한번 시작하면 3~5시간을 물속에서 버텨야 하는데 체력이 바쳐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특히 숨을 참는 시간을 1분 이내로 짧게 가져가지 않으면 3~5시간 동안 물질을 할 수 없다. 그녀만 해도 물질에 나서면 3~5시간 동안 잠수를 200~300번은 한다. 상군은 300~400번이나 한다. 물에서 나올 때 참았던 숨을 내뿜는 소리가 ‘호오이~’ 하고 들리는 ‘숨비소리’다. 물질을 하고 나서는 ‘해녀불턱’에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말린다.

해녀들은 대부분이 농사일을 겸하고 있다. 물때에 맞춰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고 지역에 따라 당근·무 등 채소는 물론 감귤 등 과일까지 농사일을 병행한다. 물때가 맞아야 하고 기상상황에 영향을 받는 만큼 한 달에 10~15일만 물질을 한다. 6~9월은 소라의 산란기라 물질을 하지 않는다.
고학금 해녀. 최충일 기자

고학금 해녀. 최충일 기자

고학금 해녀. 최충일 기자

고학금 해녀. 최충일 기자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주의 해녀들은 무명옷인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을 했다. 1980년 이후에는 검정 고무 옷을 입었고 최근에는 파란 바닷물과 보색인 오렌지색 고무옷도 나왔다.
제주시 평대리어촌계 고학금(67) 해녀는 “1970년 중반에 ‘별표 고무옷’이 나왔는데 가격이 1만5000원으로 비쌌다. 당시 40kg 쌀 한 가마 가격이 3000원 정도였으니 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고무옷이 나오기 전에는 체온이 빨리 떨어져 1시간 물질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3~5시간동안 물질을 할 수 있다”고 추억했다.

강권용 제주해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제주 해녀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며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는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제주 해녀들이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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