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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7 -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7 -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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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있으면 유월절이었다. 그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걸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유월절에는 그런 물음이 담겨 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예수의 실천적 해답이다. 그 일주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모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양을 치다가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에게 ‘신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 조상의 하느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두려운 마음에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음성은 이어졌다. “나는 내 백성이 고통당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내 백성을 구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를 찾아가 이 사실을 전했다.
에드워드 존 포인터의 작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그렸다.

에드워드 존 포인터의 작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그렸다.

나는 궁금했다. 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이삭의 하느님’이고, 그게 또 ‘야곱의 하느님’일까. 왜 그럴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그게 오늘의 아브라함, 내일의 이삭, 모레의 야곱이 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이다. ‘신의 속성’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흘러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걸 ‘초월’이라 부르고, ‘영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의 하느님이다.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한 마디로 낙원의 땅이다. 예루살렘 도성을 거닐며 나는 생각했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이 꿈꾸던 ‘가나안 땅’이 어디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바로 이 땅이 가나안이다. ‘그럼 여기가 낙원일까. 지금 이곳에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그건 아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지금도 ‘잠자는 폭탄’이고, 예루살렘 성 안에도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수시로 돌아다녔다. 게다가 통곡의 벽 앞에 서있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약속의 땅’을 찾고 있었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음에도 말이다.
예루살렘 도시에 동이 트고 있다. 왼편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이 올리브 산이다. 짙푸른 하늘 아래 돋아나는 미명이 아름답다.

예루살렘 도시에 동이 트고 있다. 왼편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이 올리브 산이다. 짙푸른 하늘 아래 돋아나는 미명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진정한 가나안은 무엇일까. 또 어디일까. 오랜 세월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나의 땅, 나의 조국’이 가나안이었을 터이다. 식민지 시절, 대한제국 백성에게 해방된 조국이 하나의 ‘가나안’이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해방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나안’을 찾고 있다. 약속의 땅, 낙원의 땅을 갈구하고 있다.

그렇게 목이 마른 우리에게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제시했다. 또 하나의 ‘가나안’을 내놓은 셈이다. 그건 유대인들이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찾던 ‘가나안’과 성격이 달랐다. 예수의 ‘가나안’은 찾고나서도 여전히 목이 마른 ‘가나안’은 아니었다. 예수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4장14절) 그 이유도 설명했다. 예수가 주는 물은 우리 안에서 샘이 된다고 했다.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안젤리카 코프만 작 ‘우물가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안젤리카 코프만 작 ‘우물가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이 있는 지역을 ‘올드 시티(Old City)’라고 부른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묵직한 돌들로 쌓아올린 성벽이 있고, 성경 속에나 나올 법한 복장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그렇다. 나는 조용한 성벽 아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예수가 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묵상했다.

예수가 주는 ‘물’이 뭘까. 메시지다. 그 메시지가 왜 특별할까. 그 속에 ‘신의 속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 앞에서 내가 부서지고, 나의 내면에 구멍이 뚫릴 때 비로소 샘이 생긴다. 그 샘에서 물이 솟는다. ‘신의 속성’이 솟아난다. 예수는 그걸 “영원한 생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예수가 제시한 가나안은 ‘땅 위의 가나안’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는 가나안이 아니다. 그걸 넘어서 있다. 나는 그걸 ‘마음의 가나안’ ‘영성의 가나안’이라 부르고 싶다. 땅 위의 온갖 가나안들이 생겨나고, 무너지고, 생겨나고, 무너질 때도 흔들림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북쪽 문인 다마스커스 게이트. 사람들이 성문을 드나들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북쪽 문인 다마스쿠스 게이트. 사람들이 성문을 드나들고 있다.

갈릴리의 호숫가, 사마리아의 우물가, 광야와 요르단 강가, 올리브 산의 동굴, 가버나움의 뒷산에서도 예수는 그런 ‘가나안’을 설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몸이 아픈 사람이든, 마음이 아픈 사람이든 다들 들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은 누구나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그게 사고사든, 자연사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두렵다. 겁이 난다. 죽음을 피할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모세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죽음’이 닥쳤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 백성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하자 신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집트 땅에서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죽을 것이다. 왕의 처음 태어난 아들부터 노예의 처음 태어난 아들까지, 그리고 가축의 처음 태어난 새끼까지 다 죽을 것이다. 그때에 이집트 온 땅에서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파라오는 모세의 경고를 무시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문틀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다. ‘죽음’은 유대인의 집을 비켜갔다. 그외에는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파라오의 첫째 아들도 죽음을 맞았다. 이날이 1월14일이다. 유대인들은 ‘파스카(Pascha)’라 부른다. 넘을 유(逾), 건널 월(越)자를 써서 ‘유월절(逾越節)’이다. 유대인에게는 아주 큰 절기다. 이 사건은 이집트에서 유대인이 해방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오래된 골목이 있다. 양 옆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오래된 골목이 있다. 양 옆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나는 예루살렘의 시장으로 갔다. 좁다란 골목 양옆으로 온갖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옷이며, 음식이며, 각종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손으로 직접 기계를 눌러서 짜는 석류 주스와 오렌지 주스가 먹음직스러웠다. 그 사이를 방탄복을 입고 자동소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누비고 다녔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섰을 때도 유월절을 앞둔 시기였다. 양력으로 따지면 4월 즈음이다.

이날 유대인들은 양을 잡는다. 예수가 예루살렘 도성에 있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다. 집집 마다 1월10일까지 1년 된 흠이 없는 어린 수컷 양을 준비해야 한다. 양을 잡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집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집은 염소로 대신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14일(유월절) 해 질 무렵에 그 양을 잡았다. 양의 피는 우슬초라는 풀에 적셔 집 문틀에 발랐다. 양의 고기는 삶지 않고 반드시 구워서 먹었다. 유대인의 유월절 풍습에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갈망이 담겨 있었다.
예루살렘 성은 위용이 넘친다. 수천 년 전에 지은 건축물이기에 더 놀랍다.

예루살렘 성은 위용이 넘친다. 수천 년 전에 지은 건축물이기에 더 놀랍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걸어서 나올 때였다. 제자들이 웅장한 성전 건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마가복음 13장1절)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너희는 저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마태복음 24장1~2절)

예수의 말은 파격적이다. 유대교의 눈으로 보면 ‘신성 모독’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을 만나는 장소’다. 단순한 상징적 의미의 수사가 아니다. 실제 그랬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기도를 해야 신에게 전달된다고 믿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을 찾는다. 예전에 그 자리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들은 이곳을 ‘신을 만나는 장소’라고 여긴다. 그런 신성한 성전을 향해 예수는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기원전 20년 헤롯 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복원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기원전 20년 헤롯 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복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예수의 예언’으로 본다. 예수 사후에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의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됐다. 처참한 살육이 자행됐다. 성전도 파괴됐다. 예수는 그 일을 예견한 것일까. 나는 예수의 어록을 다시 읽었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예루살렘 성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을까.

성전은 돌로 쌓았다. 그건 물질이다. 불교에서는 물질과 감정을 모두 합쳐 ‘색(色)’이라고 부른다. 모든 색(色)은 소멸된다. 소멸되지 않는 색(色)은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다. 색(色)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 해도 결국 ‘돌들의 결합체’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굳이 시간에 기대지 않아도 그렇다. 현대 과학은 ‘색(色)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고 말한다. 그러니 돌이 돌이 아니라 파동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파동이다. 그들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불교는 그걸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표현한다. ‘색(色)’의 정체가 ‘공(空)’이라는 말이다.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무너진 유적의 잔해를 보고 있다.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무너진 유적의 잔해를 보고 있다.

예수의 지적은 이런 이치를 관통한다. 그럼 우리 안에서 물음이 하나 피어난다. “그렇다면 신을 만나는 장소는 어디인가?” 어쩌면 예수는 이걸 되묻지 않았을까. 성전은 돌들의 쌓음이다. 결국은 허물어지는 곳이다. ‘그럼 네가 진정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예수는 그런 물음을 우리에게 되던진 게 아닐까. 그게 ‘나의 밖’인지, 아니면 ‘나의 안’인지 말이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예수는 ‘표적’이 됐다.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무시하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쏘아붙였다. “(너희는)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생긴 개종자 한 사람을 너희보다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린다”(마태복음 23장15절)며 예수는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심지어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태복음 23장27절)고 지적했다. 그러니 사두가이파든 바리사이파든 호시탐탐 예수를 노리고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고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고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죽음 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제들이 찾아와서 예수와 ‘부활 논쟁’을 벌였다가 말문이 막힌 적이 있었다. 예수의 대답이 너무 명쾌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듣고서 바리새인들이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예수를 시험해보고자 찾아왔다. 바리새인 율법학자가 물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수는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유대의 그 숱한 율법과 계명 중에 왜 이 둘을 꼽았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왔다.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한 자리. 거기에 ‘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는 ‘나’가 없다. 왜 그럴까. ‘나’가 다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 하느님만 남는다. 그래서 예수는 가장 큰 계명이라 했다. 이웃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 않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거기서도 ‘나’가 다한다. 그래서 둘은 하나가 된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그러니 가장 큰 계명이다. 단순히 받들고 지키라는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이 그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설교를 지켜보고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설교를 지켜보고 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이제 예수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유월절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유대력으로 1월12일이었다. 예루살렘 성 안의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인데,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성경에는 바로 그 시점에 유대교 제사장 가야파의 집에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파스카(Pascha)’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렇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았다.

제사장 그룹은 섣불리 예수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예수를 향한 유대 군중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 가운데 소동이 일어날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며 유월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덕분에 예수에게는 약간의 시간이 생겼다. 유월절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날의 식사가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폴란드 화가 보단 피아세키 작 ‘최후의 만찬’.

폴란드 화가 보단 피아세키 작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떼어주며 “이 빵은 나의 살이요”, 포도주를 나누며 “이 잔은 나의 피다”라고 했던 예수의 심정이 어땠을까.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수는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촉박한 시간.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또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그건 제자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받아먹어라. 이 빵은 나의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했던 예수의 어록에는 길이 있다. 나의 살을 바꾸고, 나의 피를 바꾸고, 나의 속성을 바꾸는 길이다. 예수의 살이 내 살이 되고, 예수의 피가 내 피가 되고, 예수의 속성이 나의 속성이 되는 길 말이다. 그런 길을 걷고 또 걷다가 사도 바울(바오로)은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20절) 그게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가 이 말을 던진 본질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 화가 폼포니오 아말테오 작 ‘최후의 만찬’. 산만해 보이지만 예수와 제자들의 구도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 화가 폼포니오 아말테오 작 ‘최후의 만찬’. 산만해 보이지만 예수와 제자들의 구도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예수의 제자라고 해서 다들 이런 고백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특히 유다 이스가리옷은 달랐다. 복음서에는 그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만 해도 유다는 12사도 중 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을 걸고 예수를 좇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유다는 예수를 팔았을까. 열심당원으로 추정되는 유다의 꿈은 달랐을까. 그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해방 이스라엘’이었을까. 무장 투쟁이 더 낫다고 봤을까. 그래서 예수가 설파하는 ‘마음이 가난한 나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요한복음의 서술처럼 그는 단지 ‘도둑’에 불과했던 걸까. 제자그룹의 회계를 맡아보며 종종 돈을 빼돌렸다는 건 사실일까.

어쨌든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그건 돛단배가 강물을 파는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바탕을 파는 일이었다. 유다는 그걸 몰랐다. 강물 없이 돛단배가 떠있을 수 없음을 몰랐다. 왜 그럴까. 바깥만 바라보는 이들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눈을 돌려본 이라야 알 수 있다. 아마도 유다는 바깥 세상에 강하게 집착하는 성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푸르부스(1545~1581) 작 ‘최후의 만찬’.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하자 유다(왼쪽앞)가 돈주머니를 뒤에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푸르부스(1545~1581) 작 ‘최후의 만찬’.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하자 유다(왼쪽앞)가 돈주머니를 뒤에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급기야 예수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다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제자들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예수를 쳐다봤다. 예수는 “내가 빵을 젹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며 적신 빵을 유다에게 건넸다. 빵을 받은 유다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가 밤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빛이 떨어지고, 하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수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도 떨어지고 있었다.

<38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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