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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의 제안과 삼성의 앞날

중앙일보 2016.12.04 18:07
일러스트 강일구

일러스트 강일구

삼성그룹이 기업 구조를 개선하라는 요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잘못했다가는 삼성뿐 아니라 한국 경제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삼성의 발전은 1953년부터 이어진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최근 삼성은 악재가 겹쳤다. 갤럭시노트7 발화로 최소 50억 달러의 비용과 함께 명성을 깎아먹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선 로비 의혹이 불거졌다. 정치적 악재까지 겹치면서 검찰 수사 대상이 됐다. 엘리엇은 잉여현금 흐름의 75% 이상을 주주들에게 환원할 것을 삼성 측에 요구했다. 기업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을 개선해 주주 가치를 제고해달라는 목소리다.

로리 나이트 전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장 옥스퍼드메트리카 회장

이런 요구는 이해할만 하지만 너무 근시안적이다. 세계 증시 시가총액의 50% 이상이 몰린 미국에선 기업 구조가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소수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국가들에선 중요한 문제다. 삼성 등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정부 관행은 영미권의 주주 우선주의 관점에서는 비판하기 너무 쉽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에 앞서 이런 시스템이 갖는 순기능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한국 경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축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영미식 모델보다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식 모델에 더 가깝다. 프랑스 등과 달리 독일에선 기업의 지배력이 은행 소유 지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국의 경우도 특유의 기업 구조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 성취가 불투명했을 것이다. 영미식 모델이 꼭 정답인 것도 아니다. 부와 교육 불균형, 인프라 투자 부족 등 심각한 문제가 불거졌다. 트럼프 당선이나 브렉시트(Brexit)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이 같은 영미식 모델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면서 일어났다.

영국에선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재임(1979~90년) 때 강력한 공기업 민영화와 경제 개방 조치가 있었다. 그 결과 영국의 제조업은 다국적 기업들에 대거 매각됐다. 이때 주주 가치는 많이 창출됐지만, 제조업은 기반을 잃었다. 삼성과 한국은 이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 한국은 제조업에서 자체 생산력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기업에 있어 소유권의 상실은 통제의 상실을 뜻한다. 영국은 대처 이후 금융업이 발달했지만 주요 수혜자는 외국 기업이었다.

영미식 모델과 달리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는 그동안 크게 규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의 재벌들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사업을 철저히 통제하고 조정하면서 하나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삼성 계열사들은 코스피 시가총액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기여도 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이미 삼성은 직원과 부품 공급업체, 소비자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례 없는 이해관계로 엮여 있다. 그룹이 해체될 경우 이들 사이에서 큰 혼란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삼성은 수많은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관심은 삼성처럼 브랜드 가치가 높은 대기업에 집중돼 있다. 아울러 한국 경제는 영미식 모델의 여러 단점에서 비껴나 있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이해관계자 간 조정이 쉽게 이뤄지고 있고 부의 불균형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 25~40세 연령대의 시민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비교적 균등하게 받았다. 또한 지금의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시민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재벌들이 그간 많은 비판을 받은 것에 비하면 한국 사회를 지원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주주 가치 제고는 사회에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선 비즈니스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삼성으로선 적절한 균형감각을 갖고 신중하게 고려할 문제다. 주주 가치 제고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를 주주들 마음대로 경영에 간섭하게 허용하는 것과 혼동해선 곤란하다. 옥스퍼드메트리카에서 상위 10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주가 추이를 조사한 결과 임의의 5년간 주가총액이 30% 이상 감소한 적이 있는 업체가 80%였다. 기업의 평판(브랜드 가치)은 단기적인 주가 변동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다.

삼성 측이 구조조정의 비용과 손익 여부를 재검토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힌 건 옳은 얘기다. 삼성은 주주 가치 제고 모델의 지지자들에게서만 조언을 받는 데서 벗어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외부의 압력에 맞서 회사의 장기적 가치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 훨씬 강해질 수 있다. 반대로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전략적 옵션을 줄이는 쪽을 선택한다면 삼성은 10년 안에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맹탕 다국적 기업(a bland multinational)’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로리 나이트 전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장·옥스퍼드메트리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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