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과 함께 하는 중국 근현대] 첸쉐썬, 신중국 수립 소식 듣고 귀국 결심

중앙일보 2016.12.04 02:28
1 칼텍 공학원 교수시절, 동료들과 토론하는 첸쉐썬(왼쪽 셋째). 1949년 8월, 칼텍의 구겐하임 분기(噴氣)추진센터 문전(門前).

1 칼텍 공학원 교수시절, 동료들과 토론하는 첸쉐썬(왼쪽 셋째). 1949년 8월, 칼텍의 구겐하임 분기(噴氣)추진센터 문전(門前).

무슨 일이건 운(運)도 따라야 한다. 2년만 늦었어도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출국은 불가능했다. 내친김에 중국의 해외유학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한다.

1847년 1월, 홍콩에 와있던 미국 선교사가 스무 살이 채 안된 중국청년을 데리고 귀국했다. 광둥(廣東)의 빈농집안 출신인 이 청년은 7년 후 예일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청년은 청(淸)나라 정부에 제의했다. “중국이 부강해지려면 서구의 학술과 문화를 들여와야 한다. 어린애들로 구성된 관비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자.” 고관이나 돈 많은 집안 자식들은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평범한 집안 자제 120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청 제국은 신정(新政)을 실시했다. 과거제 폐지와 학교 설립, 해외유학을 장려했다. 청년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며 짐을 꾸렸다. 90% 이상이 가깝고, 저렴한 일본으로 몰려갔다. 이 시기의 유학생들은 정치의식이 강했다. 정치학, 법학 등을 공부하며 반청(反淸) 혁명에 뛰어들었다. 제대로 된 대학을 이수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 2년만 늦었어도 미국 유학 불가능
청나라가 멸망하고 민국이 수립되자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쪽으로 중국청년들이 많이 몰렸다. 귀국하면 적어도 대학 교수 자리는 꿰찼다. 우수한 사람도 많고, 엉터리들도 많았다. “저것들 때문에 세상만 더 시끄럽고 복잡해졌다”는 불평도 심심치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 약 15만명이 해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국민정부는 해외유학을 중지시켰다. 앞서 2년 전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미국유학을 떠난 첸쉐썬은 행운아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최고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전후 건설에 투입할 과학인재 결핍을 우려했다. 정부 기관에 직접 지시했다. “교육부는 유학생 파견 10년 계획을 수립해라. 각 부처는 이공 계통에 종사할 중간 간부 숫자를 필요한 만큼 파악하고 충당 방안을 제출해라. 선발된 인재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공산당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민당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가며 지하당원과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을 선발했다. 정식으로 교육부가 실시한 유학시험에 응시케 했다. 거의 대부분이 합격해 중국을 떠났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천안문 성루(城樓)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미국에 와있던 중국유학생은 6200명이었다. 그 중 80% 이상이 이공계였다.

정권을 장악한 중공은 과학기술 인재가 필요했다. 장제스의 과학인재 양성정책으로 미국에 체류 중인 과학자들의 학업이 거의 끝났을 때였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중공 남방국 지휘시절 국민당에 잠입시켜 미국유학에 성공한 과학자 한 명을 귀국시켰다. 재미 유학생 동향을 보고받자 명단을 주며 즉석에서 지시했다. “당이 파견한 과학자들이다. 돌아가서 이 사람들과 접촉해라. 재미 중국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일류 과학자들에게 신중국 건설에 참여하자고 설득해라.”

저우언라이의 지시는 효과가 있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재미 중국 과학 공작자 협회’가 열렸다. 첸쉐썬도 참석한 회의에서 지역 대표 50여명은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귀국을 준비하자”고 결의했다. 저우언라이는 귀국 유학생 전담기구를 신설하고 베이징·상하이·우한(武漢)·선양(瀋陽) 등 대도시에 귀국한 후 과학자들이 묵을 숙소까지 마련했다. 해외에 흩어져있는 유학생들의 전공과 출신성분도 파악해 나갔다. 첸쉐썬이 미국시민이 됐다는 말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2 첸쉐썬(뒷줄 오른쪽 첫째)은 우수한 중국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조국 소식을 듣곤했다. 재미 중국 과학 공작자회의에 참석한 첸쉐썬. 1949년 6월. [사진=김명호 제공]

2 첸쉐썬(뒷줄 오른쪽 첫째)은 우수한 중국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조국 소식을 듣곤했다. 재미 중국 과학 공작자회의에 참석한 첸쉐썬. 1949년 6월. [사진=김명호 제공]

| 미국에 평생 머물 생각은 안해
첸쉐썬은 미국 시민권 취득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직접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추방당할 때까지 20년간 미국 생활을 했다. 초기 3년은 학생시절이었고 나머지 10여년은 일만 했다. 조국에 돌아와 동포들에게 충성할 준비기간이었다. 정치적인 문제로 한동안 미국시민이 된 적이 있었다.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한 후에도 미국은 국민당을 지지했다. 나는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대만으로 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어찌나 집요하고 귀찮게 구는지, 미국 시민이 되는 것 외에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평생 미국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는 근거도 설명했다. “미국인들은 퇴직 후를 위해 월급의 일부를 보험회사에 예치한다. 내게 예치 금액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한 푼도 없다고 하면 이상한 표정들을 지었다. 미국에 영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신중국 수립 소식을 접하자 귀국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6월 6일, 첸쉐썬은 평생 이날을 잊지 못했다. 칼텍 공학원의 연구실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연방수사국(FBI) 신분증을 제시했다. 엄숙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국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를 포착했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첸쉐썬은 부인했다. 곤혹스러운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
 
김명호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