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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지 빛낸 '박·카·스 삼총사'

중앙일보 2016.12.04 02:19
전인지가 지난 9월 18일 LPGA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AP=뉴시스]

전인지가 지난 9월 18일 LPGA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AP=뉴시스]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에 데뷔한 루키 전인지(22·하이트진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LPGA투어에서 낯선 환경과 골프장은 물론 언어 장벽까지 이겨내야 했다. 힘겨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전인지는 신인왕과 최저타수상(베어트로피)을 동시에 석권하며 첫해부터 최정상급 스타로 발돋움했다.
 
박 : 박원 코치

LPGA 최저타·신인상 원동력은 팀워크

카 : 카일리 프랫 매니저
스 : 존스 캐디
 
‘덤보’ 전인지는 그야말로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인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하늘로 훨훨 비상했다. 골프는 개인 종목이다. 하지만 코끼리 덤보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알려준 생쥐 티모시 같은 조력자가 없었다면 전인지의 도전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전인지에겐 스윙 코치 박원을 비롯해 캐디 데이비드 존스(북아일랜드), 매니저 카일리 프랫(호주), 매니지먼트사 팀장 윤성각씨 등 이른바 ‘전인지 팀’이 있었다.

올 시즌 환상적인 팀워크를 뽐낸 ‘전인지 팀’의 박원 코치, 매니저 카일리 프랫, 전인지, 캐디 데이비드 존스(왼쪽부터). [네이플스=김두용 기자]

올 시즌 환상적인 팀워크를 뽐낸 ‘전인지 팀’의 박원 코치, 매니저 카일리 프랫, 전인지, 캐디 데이비드 존스(왼쪽부터). [네이플스=김두용 기자]

지난달 21일 2016 시즌 LPGA투어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가 열리기 전 드라이빙 레인지. 전인지와 리디아 고(19·뉴질랜드)는 스윙 코치와 함께 마지막 점검을 했다. 전인지의 곁에는 19일 현지에 도착한 박원 코치가 있었다. 리디아 고는 세계적인 교습가 데이비드 레드베터(미국)와 함께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이날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선수들은 두툼한 옷을 입고 나왔다. 코스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쳐 최종일 숨막히는 경쟁을 예고했다. 전인지는 날씨가 추워지자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진통제를 먹고 통증을 줄였지만 스윙 전 동작인 셋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전인지는 박원 코치와 함께 셋업 자세를 재점검했다.

| 리디아 고는 나 홀로 플레이
리디아 고는 테이크 어웨이 때 클럽이 일찍 열리는 문제점을 교정하기 위해 레드베터와 함께 샷을 연구했다. 이런 현상 탓에 슬라이스 샷이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 라운드 파4의 3번 홀에서 전인지와 리디아 고가 우려했던 문제점이 터졌다. 전인지는 셋업이 흐트러져 가끔 보이는 훅 샷이 나왔다. 티샷이 왼쪽 나무 밑에 떨어져 위기를 맞았다. 레이업 후 그린을 겨냥한 세 번째 샷은 이번엔 밀려서 슬라이스가 났다.

공은 우측 숲으로 들어가 결국 전인지는 4온, 2퍼트로 더블 보기를 적었다. 리디아 고 역시 티샷이 슬라이스가 나면서 우측 숲속에 공을 떨어뜨렸다. 결국 이 홀에서 보기를 범했다. 베어트로피에 대한 의식 때문인지 전인지와 리디아 고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팀과 함께 ‘게임 플랜’을 짰던 전인지는 서서히 자신의 흐름을 찾아나갔다. 13번 홀에서 10m 버디 퍼트를 집어넣으며 반등에 성공했다. 그리고 16~18번 홀에서 3연속 버디를 낚으며 최저타수 부문에서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반드시 넣어야 최저타수상이 가능했던 18번 홀의 2.5m 버디 퍼트가 압권이었다. 이 퍼트를 넣은 전인지는 69.583타로 리디아 고(69.596타)를 0.013타로 따돌리고 최저타수상을 거머쥐었다. 결국 전인지는 1978년 낸시 로페즈(미국) 이후 38년 만에 역대 두 번째로 신인왕과 최저타수상을 동시 석권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전인지는 야디지북에 게임 전략은 물론 감정조절 방법까지 메모해 놓는다.

전인지는 야디지북에 게임 전략은 물론 감정조절 방법까지 메모해 놓는다.


전인지와 리디아 고의 차이는 ‘팀워크’였다. ‘전인지 팀’은 경기 전 머리를 맞대고 게임 플랜을 짠다. 박원 코치와 캐디 존스, 그리고 골프선수 출신의 매니저 프랫까지 한마음으로 코스 공략법을 상의한다. 전인지의 야디지 북에는 코스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이 빼곡히 적혀 있다. 박원 코치는 “야디지 북에는 게임 플랜뿐 아니라 감정 조절 방법과 경기에 도움이 되는 메모 등이 적혀 있다. 필요한 영어 단어들도 적혀 있는 ‘비밀 노트’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인지는 이런 ‘비밀 노트’를 바탕으로 올해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남녀 메이저 최저타(263타) 기록도 세웠다. 골프를 팀플레이라고 믿는 전인지는 지난달 22일 귀국 인터뷰에서도 “올 시즌 성과는 저 혼자가 아닌 팀이 함께 이뤄낸 결과”라고 강조했다.

반면 리디아 고는 전인지와 달리 철저하게 혼자서 코스 공략법을 짰다. 그래서 리디아 고의 아버지 고길홍씨는 ‘전인지 팀’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냈다. “리디아는 혼자 전략을 세워야 했다. 레드베터 코치는 스윙만 점검해주지 코스 전략을 세우는 데는 관여하지 않는다. 새로운 캐디는 아직 선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의견을 제대로 낼 수 없다.” 고씨는 박인비(28·KB금융그룹)가 지난 8월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원동력도 동행 코치 2명(남기협·김응진), 전담 캐디(브래드 비처)와 함께 전략을 세운 ‘팀플레이’라고 봤다.

| "혼자 아닌 팀이 이뤄낸 결과"
박원 코치는 허리 통증으로 샷이 흔들릴 때마다 전인지의 스윙을 바로잡아 줬다. 박 코치는 중요한 대회 때면 어김없이 대회장으로 날아갔다. 박원 코치는 스윙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큰 도움을 준다. 전인지는 스윙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곧바로 박원 코치에게 달려간다. 박원 코치는 전인지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인지는 궁금증이 풀려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보는 성격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매우 괴롭히는 유형이다. 올해 스코어를 관리하고 게임을 조절하는 매니지먼트 능력이 눈부시게 향상됐다. 이로 인해 최저타수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선수 출신의 캐디 존스는 전인지가 처음 접하는 코스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다. 존스는 수학 영재 출신인 전인지와 함께 코스 공략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코스에서는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도 맡았다. 지난 9월 에비앙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 18번 홀에서 존스는 파 세이브를 해야 메이저 최저타수 신기록이 가능했던 전인지에게 재치 있는 제안을 했다. “만약 네가 파를 기록하면 내가 저녁을 살게”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전인지는 “(내기에 이겨서) 비싼 음식을 먹겠다”고 답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대화로 긴장을 누그러뜨린 덕분에 전인지는 파 세이브에 성공하며 대기록을 세웠다.

매니저 프랫은 미국 생활 적응을 위한 손과 발이 됐다. 간식과 진통제를 챙겨주는 등 세심한 부분은 물론이고,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전인지에게 영어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전인지는 “매니저 덕분에 영어를 빨리 익히고 외국 선수들과 잘 어울리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전인지 팀’은 언어장벽을 올해 최대 난제로 꼽았다. 그래서 울면서까지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낯선 환경과 코스 적응도 힘든데 영어 공부까지 해야 했던 전인지는 “운동만 하면 안 되느냐”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박원 코치는 “너무 힘들어서인지 인지가 한번은 ‘한국과 일본에서 편하게 골프를 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귀띔했다.

| 프랑스어로 우승 소감 밝혀 박수갈채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매니저와 캐디가 맡았지만 인터뷰 답변 등 준비가 필요한 부분은 박원 코치가 담당했다. 박원 코치는 “대회 때마다 필요한 문장과 단어들을 외우라고 숙제를 내줬다. 챔피언 조로 출발하면 영어 인터뷰도 빠짐없이 준비했다”고 밝혔다. 에비앙 챔피언십 때 전인지가 필드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장면이 방송 화면에 여러 차례 잡혔는데 이런 행동은 미리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전인지는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 직후 열린 시상식에서 틈틈이 외운 프랑스어로 우승 소감을 밝혀 큰 박수 갈채를 받았다. 박원 코치는 “한국 선수가 프랑스어로 소감을 밝히자 현지 갤러리들이 감동한 나머지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인지는 의사소통과 언어 공부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다소 ‘무식한’ 영어 공부법을 통해 회화를 배워나갔다. 문장의 틀을 익히고 거기에 단어를 바꿔가며 응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전인지의 회화 능력은 날로 향상됐다. 존스와 프랫은 “인지의 영어는 문장을 통으로 외우는 ‘한국식 영어’였지만 정말 발전 속도가 대단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전인지가 열의를 다해 팬들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드러내자 외국 팬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일부 일본 팬은 유럽으로 원정 응원을 갈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전인지는 지난해 7월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는 이후 US여자오픈이 열렸던 뉴욕주 랭커스터 지역의 자선단체에 2년 연속 남몰래 기부를 하기도 했다. 전인지의 선행에 감동받은 랭커스터 주민들은 올해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이 열린 네이플스까지 응원을 오기도 했다. 전인지의 공식 팬클럽인 ‘플라잉 덤보’엔 최근 외국인 팬들도 합류하고 있다.

전인지는 “2016년은 완벽한 시즌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점수를 매기라면 94점 정도 주고 싶다”며 “항상 응원해 준 팬들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골프채널은 “전인지가 웃는 모습은 여자 골프 ‘올해의 미소’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전인지의 미소는 환상적인 팀워크와 각고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네이플스=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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