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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서 수천 번 실험, 암치료 쓰이는 라듐 추출

중앙선데이 2016.12.04 00:44 508호 22면 지면보기

3 1905년 라듐을 담은 작은 관을 얼굴에 부착하고 안면질환을 치료 받고 있는 여성의 모습. 초기 방사선 치료 장면이다. [중앙포토]



흔히 퀴리 부인으로 불리는 폴란드계 프랑스 과학자의 정식 이름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다. 스크워도프스카는 폴란드인 아버지의 성인 스크워도프스키의 여성형이고, 퀴리는 프랑스인 남편 피에르 퀴리(1859~1906)의 성이다. 퀴리는 두 성을 붙여서 함께 사용했다. 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다. 프랑스에서 낳은 두 딸에게도 폴란드어를 익히게 했다.


[이노베이터, 세상을 뒤집다] 퀴리 부인

퀴리는 1867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브로니스와바는 중학교 교사였고 아버지 브와디스와프는 장학사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의해 3차례(1772·1793·1795년) 분할돼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가인 퀴리의 둘째 딸 이브 퀴리(1904~2007)가 1937년에 쓴 전기 『퀴리 부인』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국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심 투철했던 폴란드 여학생 퀴리]

바르샤바의 한 여자 중등학교. 폴란드 역사수업이 한창이었다. “마냐(마리아의 애칭), 스타니스와브 아우구스트 포냐토브스키에 대해 말해 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마지막) 왕(1764~1795 재위)으로 현명하고 인자한 분이었으나 용기가 없어 나라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 틈을 타서 외국이 침략했습니다.” 학생들과 선생님의 표정이 모두 침울해졌다. 순간 벨이 울렸다. 학생들은 잽싸게 폴란드 역사책을 숨기고 바느질감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윽고 러시아인 장학관이 교실에 들어왔다. “바느질도 좋지만 러시아어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잘 공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 교사는 마냐를 일으켜 세웠다. 장학관은 러시아어로 기도문을 외우게 한 뒤 다시 질문했다. “(폴란드를 마지막으로 합병한)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62~1799 재위) 이후 러시아 차르의 이름을 외워 보아라.” “파벨 2세, 알렉산데르 1세, 니콜라이 1세입니다.” “그럼 현재 이 신성한 러시아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시냐?” 마냐는 한참 망설이다가 답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데르 2세입니다.” 대답을 들은 장학관이 흡족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서자 마냐는 선생님께 안기면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동료 학생들도 모두 울었다.



이 대목은 퀴리의 애국심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그는 과학자로서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분야인 방사성 물질을 개척한 혁신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유리 천장(사회적 장벽)’을 여러 차례 깨뜨렸다. 퀴리에게는 ‘선구자’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였던 퀴리는 우선, 여성으로서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노벨상을 두 차례 받은 유일한 여성이다. 여성으로서 파리대에서 처음 정교수 자리에 올랐다. 여성 최초의 기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1년이 지난 1995년에도 계속됐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영웅들이 영면하는 팡테옹에 여성으로는 처음 안장됐기 때문이다. 남편 피에르와 함께였다.



 

1 방사능 실험실에서 남편 피에르와 함께한 마리 퀴리.



1903년 남편 피에르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1911년에는 혼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퀴리는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참고로, 미국 화학자 라이너스 칼 폴링(1901~1994)은 화학결합 연구로 1954년 노벨 화학상을, 1962년 지표 핵실험 반대활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각각 받아 유일하게 노벨상을 두 차례 ‘단독’ 수상했다. 존 바딘(1908~1991)은 1956년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로로, 1972년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두 차례 공동 수상했다. 영국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1918~2013)는 1958년 단백질 서열을 해석한 공로로, 1980년 DNA 염기해석법 개발로 노벨 화학상을 두 차례 공동 수상했다.

4 왼쪽부터 큰딸인 물리학자 이렌 졸리오 퀴리, 마리 퀴리, 작은딸인 음악가 겸 작가 이브 퀴리. 여성사회활동의 지평을 넓힌 가족이다.



퀴리는 2대에 걸쳐 모두 다섯 개의 노벨상을 받은 퀴리 가문의 주역이다. 큰딸 이렌 졸리오퀴리(1897~1956)는 1935년 남편 페레데리크 졸리오퀴리(1900~1958)와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작은딸 이브 퀴리의 미국인 남편인 헨리 라부아스(1904~1987)는 유니세프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유니세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라듐은 퀴리가 발견해 추출한 뒤로 질병, 특히 암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사용됐다. 오늘날 암 치료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사선 치료의 문을 열었다. 방사성 물질을 화학적으로 연구해 진단·치료·비파괴검사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방사선 화학이라는 분야도 새롭게 개척했다. 전 세계에서 연간 1kg 미만 생산되는 희귀물질인 라듐은 암 치료용 라돈 가스나 중성자 생성 등에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2 1901년 X-선으로 결핵을 치료하는 모습. 방사선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전의 치료법이다.



퀴리는 방사선이라는 개념의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실 라듐의 발견은 독일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1845~1923)의 X-선 발견과 프랑스 과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1852~1908)의 방사선 발견에서 이어지는 업적이다. 뢴트겐은 1895년 진공 유리관 속의 금속 전극에 고압 전류를 흘리면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 인화지에는 흔적을 만드는 미지의 선을 발견하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에서 ‘X-선’으로 이름 붙였다. 그 몇 개월 뒤 베크렐은 검은 종이로 감싼 우라늄염에서도 사진 인화지에 흔적을 남기는 미지의 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를 ‘베크렐선’으로 불렀다. 1897년에 파리 대학에서 학위를 준비하던 퀴리는 이 베크렐선을 연구해 학위논문을 쓰기로 했다. 그의 연구에는 당시 남편 피에르가 연구하던 전류계가 한몫했다. 방사선은 기체를 이온화시킨다. 따라서 기체에 방사선을 쪼이면 전류가 통하게 된다. 퀴리는 피에르가 만든 전류계를 써서 방사선 강도를 측정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하던 자기 연구를 포기하고 부인과 함께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게 됐다. 부부의 연구가 서로 시너지를 이룬 셈이다.



 

[베크렐선 정체 밝히고 방사선 명명]

퀴리 부부의 라듐 발견은 사실 수없이 반복되는 고된 실험을 거쳐 이룬 업적이다. 이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강한 방사선을 내는 새로운 원소였다. 퀴리는 이를 정제하는 작업에 들어갔지만 연구비는커녕 실험실을 얻기도 힘들었다. 퀴리는 남편과 함께 자비를 들여 8t의 우라늄 폐광석을 구했다. 실험실은 의대에서 해부실로 쓰다 버린 낡고 퀴퀴한 헛간을 구해 사용했다. 분리 추출 과정에선 독한 연기가 수시로 나왔지만 이를 빨아들여 제거할 굴뚝도 없는 열악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연구비나 시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라듐의 분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갔다. 퀴리는 그곳에서 4년에 걸쳐 수천 번에 걸쳐 분리·정제 작업을 반복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그 결과 1902년 염화라듐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라듐의 원자량을 측정했으며 라듐은 원소주기율표에 자리 잡았다. 퀴리는 이렇게 베크렐선의 정체를 밝히면서 이를 ‘방사선’으로 이름 붙였다. 방사선 시대의 탄생이다. 퀴리는 1903년 이를 바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부부가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퀴리는 고된 작업을 이기면서 끝없는 시도로 마침내 과학적인 진보를 이루는 과학 연구의 전형을 보여줬다. 물론 여기에는 혁신적인 사고로 방사능 물질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퀴리의 영감도 크게 작용했다. 퀴리를 혁신의 과학자로 부르는 이유다.



1906년 남편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퀴리는 남편의 자리를 이어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라듐 분리 연구를 계속 진행해 1910년 순수한 금속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다. 주목할 점은 퀴리가 이때 라듐 분리과정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라듐을 의학적으로 활용하는 연구가 활발했는데 퀴리는 더 많은 사람이 의학적으로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특허를 포기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대신 그에게는 명예가 더해졌다. 1911년에 받은 노벨 화학상은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 라듐의 분리, 라듐과 그 화합물 연구의 업적을 인정한 수상이었다.

5 1차대전 당시 X-선 장비를 실은 트럭을 타고 전선을 누비는 마리 퀴리. [중앙포토]

[진단·치료 방사선과 기반 닦아]

퀴리의 업적은 방사선 화학의 효시였다. 이를 계기로 과학자들이 수많은 방사선 물질을 발견하고 그 효능을 연구해 오늘날 의학 분야에서 진단방사선과와 치료방사선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화학요법·수술과 함께 항암 치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사선 치료는 퀴리라는 혁신가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해 잘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라듐을 신체에 붙이거나 결핵 치료를 위해 X-선을 가슴에 쬐는 위험한 치료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한 연구로 방사선 물질의 위험은 줄이고 활용도는 넓힐 수 있게 됐다.



퀴리는 두 번째 노벨상을 받은 뒤 라듐을 비롯한 방사능 물질을 암 치료 등에 활용하는 연구를 수행할 라듐연구소의 개소를 준비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그는 새로운 조국인 프랑스를 위해 전선으로 나섰다. X-선 장비와 라듐이 붕괴하면서 발생하는 방사능 물질인 라돈 기체를 의학적인 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발해 트럭에 실었다. 이 트럭에 탑승해 전선을 누비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조국인 프랑스에는 폴로늄이라는 원소 이름을, 자신에게 교육과 연구의 기회와 국적을 준 새 조국 프랑스를 위해서는 과학과 참전으로 보답한 셈이다.



퀴리의 업적은 비단 국가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 방사선 치료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인류에게 질병에 맞설 새로운 ‘나이키의 창’과 ‘이지스의 방패’를 선물했다. 퀴리는 1934년 방사능 물질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났다.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미처 몰랐던 전쟁 당시 방사성 물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다.



1차대전이 끝난 1919년 파리대와 파스퇴르연구소가 공동으로 ‘퀴리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는 방사능 물질의 의학적 활용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연구소다. 종양학과 세포생물학, 방사선을 활용한 항암치료 연구의 세계적인 연구기관이다. 1932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들어선 라듐연구소는 현재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종양연구소’다. 과학 교육과 연구로 이름 높은 파리 4대학은 ‘피에르와 마리 퀴리 대학’으로 불린다. 영국에도 마리 퀴리 종양연구소가 있다. 바르샤바의 비수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퀴리의 혁신적인 업적은 아무리 기려도 지나치지 않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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